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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단:『히포크라테스 전집』 번역에 부쳐
학술논단:『히포크라테스 전집』 번역에 부쳐
  • 반덕진 우석대
  • 승인 2005.03.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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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步千里'의 마음으로...학자적 생명 걸어야

반덕진 / 우석대?건강학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플라톤 전집’,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의 3대 전집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두 철학 전집과 함께 고대 이래 지금까지 서양적 사유를 형성해 왔다.

히포크라테스는 플라톤보다 32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76세 정도 연상이고, 그의 논문들은 두 철학자의 논문들보다 먼저 기록됐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이미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핵심 논문들이 나왔거나 나오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이 전집의 주요 논문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물론 개별 논문이 ‘히포크라테스 전집’으로 편집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보존된 곳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 부속 도서관인데, 이 도서관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중세도서관의 실제 모델로, 이곳에서 기원전 3~2세기경에 ‘히포크라테스 전집’이 형성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기원전 1세기 경에 편집되었다.

19세기의 유럽에서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프랑스의 리트레에 의해 ‘히포크라테스 전집’(1839-1861)이 완역되었고, 영역본의 경우 하버드 대학교에서 러브 고전 총서(LCL)의 일부로 1923년부터 출간되고 있다. 물론 현대에 오면서 이 전집은 의사들의 서재에서 고전학자들의 서재로 옮겨지고, 히포크라테스 의학 강좌가 의과대학의 교과과정에서 사라졌으나, “히포크라테스 정신(Hippocratic spirit)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 역시 여전하다.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은 이미 오래 전에 퇴색했으나 히포크라테스의 사유가 의심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서양의학의 아버지’ 혹은 ‘선서’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사들은 물론 심지어 인문학자들조차도 그의 전집의 여부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프랑스의 자크 주아나가 쓴 ‘히포크라테스’(아침이슬 刊)의 역서가 나오고, 지난 2월말에 필자가 ‘히포크라테스의 발견’(휴머니스트 刊)을 펴내면서 우리 사회에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그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위의 졸저에서 ‘히포크라테스 전집’ 번역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제기하는 내용의 프롤로그를 별도로 달았다. 최근 이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직간접으로 감지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번역 작업의 기획안이 그리스 고전 번역의 원칙과는 거리가 있는 듯해서 염려된다. 이 전집의 번역작업은 리트레 판도 22년이 걸렸고, 하버드 대학의 러브 판의 경우는 80년이 지나도록 완역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플라톤 전집’의 국내 번역만 해도 박종현 교수의 필생의 작업으로 이제 겨우 35% 정도만이 진행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경우는 20%정도만이 역주되었다. 이런 사실 외에도 히포크라테스와 고대 의학에 관한 연구 성과가 매우 일천한 국내 현실에서 이 분야의 연구 성과가 거의 없는 연구자들을 섭외하여 단기간에 번역해내겠다는 구상은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책의 번역서가 일단 나오게 되면 이후 다른 역주서가 출간되기 어려운 국내 출판 현실을 감안해볼 때, 이는 언어 능력과 임상 능력은 물론 그리스 문화에 정통한 학자들이 느긋한 자세로 학자의 생명을 걸고 임해야 하는 작업이다. 원문과 같은 분량의 충실한 주석을 달아 후학들이 원전 번역에 들이는 시간과 정력을 보다 생산적인 곳에 쓸 수 있고 나아가 의학자는 물론 인문학자들이나 자연 과학자들도 마음 놓고 인용할 수 있는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역주서가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牛步千里)는 여유 있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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