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9:05 (금)
李 교수의 비디오 샵에 가다 : 화가를 다룬 영화들
李 교수의 비디오 샵에 가다 : 화가를 다룬 영화들
  • 이병창 동아대
  • 승인 2005.02.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폭 속의 시간을 찾아서

필자는 평소에 영화란 모름지기 욕망의 드라마라 생각했으며 그래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같은 누와르 영화들을 즐겨봤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그런 영화들보다는 오히려 화가를 그려낸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이 지성사나 정신사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더 마땅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런 영화들은 대개 화가의 생애를 다루는 전기 영화지만 다큐멘타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극적 드라마의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이 전개한 에피소드의 진위가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화가의 고뇌와 미학적 개념의 형성과정을 잘 드러낸다.


관객의 편에서 볼 때, 이런 영화들은 우선 화가가 살았던 시대나 개인적 삶을 눈앞에 재연함으로써 역사철학자 크로체가 강조했던 역사적 추체험을 가능케 해준다. 또 다른 매력은 그것들이 단순히 화가의 삶을 넘어서 그림 자체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 매체는 그림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그림은 평면적이고 비시간적이다. 그러나 이런 그림은 화가의 일정한 운동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단순히 실제 공간적 운동만은 아니다. 그것은 상상과 현실, 재현과 실제의 공간들을 넘나들고, 시각과 촉각의 세계를 넘나든다. 이제 운동하는 영상 매체로서의 영화는 평면화된 그림 속에 응결된 이런 운동을 회복시켜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이제 소개될 각 영화들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중세의 성상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레프를 다룬다. 그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루블레프의 개인적 삶보다 그 시대 러시아의 역사적 삶을 드러내려 했다. 이 영화의 주된 에피소드로서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 환상을 제공하면서, 잔인한 독재자의 힘을 빌어 민중의 집단노동을 끌어내고 마침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어낸 보리스까의 이야기는 예술의 개념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품게 한다.  


19세기말 화가 로트렉의 삶을 다룬 영화로 ‘물랭 루즈’(바르 루어만 감독) 나 ‘로트렉’(로저 플랑송 감독)도 있지만, 필자는 여기서 존 휴스톤 감독의 영화 ‘물랭 루즈’를 소개하고 싶다. 이 영화는 로트렉이 길거리의 여자 마리 샬레와의 잠깐 동안의 사랑을 이야기의 골자로 삼고 있는데, 이 에피소드는 그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로트렉의 내면적 고독을 드러내는데 성공적이다. 더구나 로트렉의 물랭루즈를 소재로 한 여러 포스터를 영화 속에서 직접 재연함으로써 그림 속의 운동성을 회복시키고 있다.


반 고흐를 다룬 영화로는 ‘빈센트’(로버트 알트만 감독)보다는 ‘반 고호’(모리스 피알라 감독)가 훨씬 좋다. 이 영화는 고흐의 우베르에서의 마지막 생애를 다룬다. 여기서 감독은 고흐의 삶을 억지로 해석함이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그가 파리에 가서 동생 테오와 예술에 관해서 논쟁한 이후, 그를 연모하여 파리까지 찾아온 가세 박사의 딸 마게리뜨와 더불어 집시들 속에서 관능적이고도 민중적인 향연에 빠지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 분위기는 고흐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느낌과 매우 잘 어울린다.


‘누드가 있는 풍경’(헤닝 카리슨 감독)은 화가 고갱의 삶을 다룬다. 이 영화는 고갱이 티히티 섬에서 파리로 돌아와 다시 티히티를 향해 하숙집을 떠나는 장면까지 계속된다. 영화는 마치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오딧세이처럼 티히티로 돌아가려 고투하는 고갱의 삶을 보여준다. 그러는 가운데 영화는 그의 그림에 주목한다. 그래서 고갱의 그림을 타이틀이나 전시회 및 고갱 자신의 화실에 걸어 놓거나, 그의 대화나 토론을 통해 그의 개념틀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일본 여자 모델 장면을 통해  화가의 그림 밖의 작업공간을 보여준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피카소’는 피카소의 생애 가운데 프랑스와즈와의 사랑의 시대를 집중 조명하는데, 그 가운데 영화는 오히려 피카소의 즐거운 소동, 어린아이 같은 나르시시즘, 끝없는 성적인 탐닉, 여자와 주변세계에 대한 지배욕 등을 보여준다. 피카소는 지칠 줄 모르는 투우에 비유된다. 그림과 관련하여 이 영화 속에 피카소의 그림 그리는 과정 자체가 쇼트 되어 있다.


‘까미유 클로델’은 부루노 뉘땅 감독의 영화인데, 영화는 여기서 까미유가 조각가인 로댕을 사랑하면서 결국 파괴되는 모습을 주로 조명한다. 보통의 경우 예술가는 사랑조차도 예술을 위해 희생하는데 반해 여기서 까미유는 사랑에 집착하면서 스스로의 예술조차 몰락하게 된다. 


폴록을 다룬 영화 ‘폴록’은 에드 해리스 감독이 주연 배우로 직접 출연한 작품이다. 감독은 잭슨이 역시 화가였던 리 크래즈너와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리 클래즈너는 우울증 자학과 알콜중독에 사로잡힌 폴록을 부축해서 그의 에너지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또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며 감독인 해리스가 직접 카메라 앞에서 폴록의 작품 그리는 과정 자체를 재연한다.


쥴리앙 슈나벨 감독의 영화 ‘바스키아’는 바스키아가 식당에서 애인 지니를 만나고  27세 때 요절하기 까지를 다루는데, 여기서 뉴욕의 미술가들의 세계 특히 팝 아트의 앤디 워홀과의 교제 등이 중심 줄거리가 되고 있다. 영화는 그런 가운데 바스키아의 그림을 재연한다. 특히 바스키아의 꿈꾸는 속에서 자동자 바퀴에 흰 페인트를 칠해나가는 장면은 아주 감동적이다.


쥴리 타이모 감독의 영화 ‘프리다’는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의 생애를 다룬다. 여기서 그녀의 남편인 혁명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가 중심이 된다. 이를 축으로 해서  화가 프리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전개되는데, 영화는 프리다의 그림의 형식 자체를 재현하려 애쓴다. 특히 극중의 프리다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라던지 그림 속에 침대가 하늘로 날아가다가 마침내 불타는 장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은 장승업의 생애를 다루는데, 그의 미의식이 발전하는 논리적 계기에 따라 재구성돼 있다. 영화는 한옥의 다층적 프레임을 자주 이용해서 장승업의 미의식을 둘러싼 세계, 즉 문인화를 위주로 한 양반세계, 상업적 미술세계(춘화와 같은 풍속도), 그리고 오원의 기운생동의 세계를 구분하여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자연 현실 속에 감추어진 기운생동의 측면을 영화적 카메라로 포착해 내는데, 기운찬 나뭇가지며, 하늘을 나르는 새떼 같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다루는 영화 ‘사랑은 악마다’(존 에이베리 감독, 국내 미출시) 또는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 하나를 주제로 삼은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피터 웨버 감독), 그리고 모델과 화가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 ‘누드 모델’(자크 리베뜨 감독) 역시 함께 추천하고 싶다.


이병창 / 동아대 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