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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연민의 시대적 진정성 看過
시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연민의 시대적 진정성 看過
  • 한원균 청주과학대
  • 승인 2004.1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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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황종연 교수의 고은 비판 적절한가

▲한원균 / 청주과학대·국문학 ©
오래 전에 안토니 이스트호프의 ‘문학에서 문화연구로’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1990년대 중반의 문학적 상황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그야말로 문화의 다양한 층위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문학작품의 개별적인 의미는 영화, 예술 등 주변의 다양한 문화적 형태와 습합되면서 그 문학적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지속적으로 염려되었던 것은 작품이 정치, 사회 현상을 방증하는 참고자료에 머물러서는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요즘 다시 이런 고민에 봉착해 있음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황종연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이라는 글에서 고은의 ‘만인보’를 중심에 두고 민주주의와 민중-민족주의의 관계를 제시한 후, 몇 가지 차원에서 ‘만인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황 교수의 ‘만인보’ 비판은  토론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 글은 최근 고은의 시를 어떻게 볼 것인지, 혹은 동시대 한국 시의 지형에서 고은의 시는 어떤 의미망을 형성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황교수의 문제제기는 고은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며, 고은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중요한 논거가 될 것이며, 오늘의 이 질문이 이러한 과제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는 생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황 교수가 제시한 고은의 ‘만인보’의 민중적 성격에 관한 물음이다. 황 교수는 이 시집(이하 ‘시집’)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민중, 계급, 국가라는 집단주의적 행위규범이 워낙 일반적이어서 집단 소속감이 약하거나 집단의 일체감을 손상시키는 개인들이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이 같은 집단주의는 시집에 등장하는 개인들로 하여금 집단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결국, 개인의 관점에서 한국인을 탐구하고 이해할 여지를 시집은 차단한다고 말한다.

이 시집에 실린 개개의 작품은, 대개, 시인 혹은 화자(이 시집에서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고 이 둘은 일치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가 발견하는 삶을 먼저 그리고, 이후에 그에 대한 시인의 이해와 가치판단이 교차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계급의 자기이해의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층민들의 삶을 자주 보여준다. 문제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 즉 세계관이다. 즉, 시인이 선택한 개인의 삶은 그 자체로 생경하게 존재하지 않고 미학적인 왜곡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이든, 간접적인 경험이든 실재에 대한 단순 모방이나 재현이라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이 시집을 오독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시집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통일된 자아”는 이 시집의 세계관의 일단을 잘 드러내는 표지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민중이라는 관념은 관념 자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삶의 구체성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인이 민중이라는 관념을 표나게 드러냈다면, 그것이 어떻게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에 의해 선택된 인물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이 놓인 현실적인 배경, 가령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체험이라든지, 한국전쟁 시기의 죽음, 이별 등과 관계 지워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자 하는 일정한 의도야말로 이 시집을 의미있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한 시대의 질곡의 역사와 관련되는지를 보여준 ‘예외적 개인들’이다. 집단, 계급의 의식은 이런 관점에서 예외적 개인이 담지할 수 있는 ‘가능의식의 최대치’에 해당된다.

근대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일과 자발적 개인들의 삶의 문제는, 한국 현대문학에서 자유의 확대라는 문학적 화두를 형성했고 그것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과제와 함께 제외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으며, 여전히 한국적 상황에서 문학 상상력의 사회적 의미는 공적인 체험을 어떻게 내면화할 것인가의 문제와 결부된다고 할 수 있다. 시집 곳곳에 편재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지난 시간의 기억을 공간화, 체험화하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는데, 이는 민중이라는 선험적 관념을 압도한다.    

둘째, 황 교수는 “국민 또는 민중 속에 존재하는 혁명적 폭력을 향한 충동은 시집 곳곳에, 특히 한국전쟁기의 이야기를 다룬 시편 곳곳에”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러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 조선인의 정치적 주권을 무시한 강대국과 무책임한 정치 엘리트들에게 있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거기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이 모호한 문장으로 황 교수 자신은 판단을 유보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지가 이미 제출되어 있지만, 문제는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그 비극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감응을 제시하는 일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과제라는 데에 있다. 사회학자가 아닌 다음에 시인은 전쟁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핍박과 수난 속에 힘들게 살다가 떠나버린 자들에 대한 연민의 시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이데올로기라는 명분, 정치와 권력의 간계에 의하여 고통받는 개인의 삶을 그렸다는 사실에 좀더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국가주의라는 환상을 강화시키고, 개인은 그 명분 아래 희생당하는 모습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데 이 시집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황 교수는 “민중의 온갖 정체성들을 민족사의 일의적 서사 속으로 합병하는 민족시인의 정치적 상상력이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 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같은 유추가 권력화의 욕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이 시집을 민중주의적,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선험적으로 추인한 결과 나타난 성급한 예단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최근 고은의 다른 작품들을 면밀하게 읽어 본 독자라면, 그가 진지한 반성을 통해 민중-민족이라는 집단성의 문제로부터 그 시적 패러다임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삶을 벗어나 인류사적인 문제로부터 문학적 상상력을 빌어오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제 ‘만인보’로부터 촉발된 고은론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대 시의 지형에서 고은의 위치에 대한 논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시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관점과 관련된다. 앞의 황 교수의 논의에 대한 하정일 교수의 비판, 그리고 황 교수의 재비판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민중-민족주의’는 그것에 대한 ‘옹호/거부’의 문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특히 문학적 대응방식을 문제 삼을 경우,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삶의 층위를 내면화하느냐의 문제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부재하는 문제점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윤리는, 상호승인과 이해가 문화적, 제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비도덕적이며 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집단에 대한 거부감을 자기시대의 이념적 좌표로 삼았던 1980년대로부터 우리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시험하고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듯하다. 1990년대 이후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은 시로부터 공적 의사소통의 한 기능을 탈각시켜 버렸다. 자본주의 일상성의 ‘천박한 모습’에 대한 ‘절실한 반영’을 시대정신으로 직조해내는 기술과 고급 상업주의는 효과적으로 결탁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오래 전에 헤겔이 말했던 시민사회란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능성이 사회적 연관 속에 놓이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은 희석화되고 말았다.

고은의 최근 시적 관심은 한국적 시민성의 모색에 모아진다. 여기에는 몇 가지 단계가 내포된다. 먼저 남과 북의 갈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의 문제와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와 한국의 삶, 그리고 국지적 모순과 세계사적 모순의 상관성 등에 대한 시적 탐구가 그것이다. 가령, 시집 ‘남과 북’에서 시인은 이질화된 분단상황을 극복하는 한 가지 대안으로 분단 이전의 말[言], 즉 가장 토속적이면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어떤 생활공간의 언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또한 최근 시인의 관심은 한반도 내의 특수성의 문제에서 인류사의 문제로 이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질곡의 역사를 등에 지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 더 이상 주변부의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실존적 조건의 회복, 자유와 평등의 실현, 문화적 정체성의 확인과 다원주의의 수용 등 세계사적인 과제와 긴밀하게 연관이 있는 과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고은 문학의 이 같은 요소는, 서구적 합리주의의 극복에 대한 철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하고자 하는 김지하, 분화된 삶을 관조적인 어법으로 제시하는 신경림 등과 함께 우리시대 문학의 현실적 유효성에 대한 물음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는 미덕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의 시는 동시대 한국문학의 거울이자 우리문학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통한 비판미학의 정점에 이들의 시가 서 있다는 판단은 여전히 가치가 있으며, 새로운 모순이 여러 갈래의 모습으로 출현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들의 문학은 비판적 모더니즘의 한 유형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수용할 수 없는 심리적 딜렘마에 대한 문학적 대응 방식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시가 처한 상황을 적실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고은의 시는 시인 자신과 화자의 비분리를 통한 비판적 지성의 시, 정신의 시(poesie des Geist)를 강조한다. 시인으로부터 한 편의 시가 어떻게 外化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시대의 비판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지 천착하는 일이야말로 지금부터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경희대에서 ‘고은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으로 당선했다. 논문으로 ‘한국문학의 현대성 비판’ 등이 있으며, 저서로 ‘일굼의 문학’, ‘비평의 거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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