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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학계결산: 올 한해를 빛낸 학술서들
2004 학계결산: 올 한해를 빛낸 학술서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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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사회분석 주목...학문주체성 논의 본격화

한 사회학자는 올해가 사회학적 주제들이 무수히 많이 생산된 한 해임에도 특출한 사회학적 분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말 가뭄의 단비처럼 두 철학자가 우리 사회현실을 통괘하게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상봉 교수의 ‘학벌사회’(한길사 刊)와 최봉영 항공대 교수의 ‘한국사회의 차별과 억압’(지식산업사 刊)은 ‘자생이론’으로서 돋보이는 작업들이다.

김상봉 교수는 학벌이 관계의 추상성 속에 서 있는 어쩔 수 없는 괴물이 아니라 “일정한 외연과 질량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실체”임을 주장하면서 이를 개념화하고 그 존재를 이론적으로 서술했으며, 최봉영 교수는 한국어의 ‘존비어체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사회의 고유한 차별구조를 읽어내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언명을 국내에서는 최초로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김만수 대전대 교수가 펴낸 ‘실업사회’(갈무리 刊) 또한 실업의 통계현황에만 머물지 않고 분석과 통찰, 대안까지 촘촘하게 얽어놓은 저술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올 한해 과학서적계는 유전자 관련 번역물들이  휩쓸고 다녔다. 스티븐 핑커의 ‘빈서판’(사이언스북스 刊)과 ‘언어본능’(소소 刊), 리처드 도킨스의 ‘눈 먼 시계공’(사이언스북스 刊) 등이 그것들이다. 

다른 한편, 과학학자들이 모여서 펴낸 ‘인문학으로 과학읽기’(실천문학사 刊)나 홍성욱 서울대 교수의 ‘과학은 얼마나’(서울대출판부 刊) 등의 저서들은 과학됨의 사회적 조건과 인문학적 시야를 확보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보여줬다. 과학사 분야에서는 단연 이종찬 아주대 교수의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근대’(문학과지성사 刊)였다. 저자가 이 땅에 살면서 면역화된 ‘민족주의’와 ‘문화적 이중성’이 내적으로 일으킨 갈등을 이겨내면서 한국의학사의 연구방향을 제시한 역저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조선 후기 과학사상사 연구’(구만옥 지음, 혜안 刊)는 조선 후기 우리 조상들이 세계 인식의 중심으로서 어떤 자연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사상사적 맥락을 꼼꼼히 살핀 국내의 거의 최초의 책이었다.

역사학은 고구려사와 고종시대가 쟁점이 되면서 이 분야에서 각각 성과물이 한권씩 나왔다. 고구려 지역의 역사를 중국과 조선 사이에 존재한 제3의 역사공동체인 ‘요동’의 틀에서 재조명해야한다는 논쟁적 주장을 펴 학계를 술렁거리게 한 김한규 서강대 교수의 ‘요동사’(문학과지성사 刊)가 고대사 쪽에 있었다면, 조선 후기의 경제상황을 ‘지대량’을 통해 따질 수 없다고 지적한 김건태 박사의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역사비평사 刊)은 지대량의 변화 등을 분석해 조선 후기 사회가 체력을 소진해 멸망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한 유명한 저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이영훈 편)와 미묘한 대립각을 형성하기도 했다.

국문학계에서는 문학사 연구와 평론 부분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 한권씩 출간됐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의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소명출판 刊)는 일제시대 작가들의 내면적 논리 점검을 통해 ‘친일’을 ‘협력’의 문제로 나눠서 접근해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문학비평 하는 철학자 김진석 인하대 교수 또한 그의 비평연작의 첫 신호탄으로 ‘소외에서 소내로’(개마고원 刊)을 펴내 문학평론가 김수이 씨와 논쟁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의 문학비평은 헤게모니화된 문학비평 내부의 관념과 도식, 개념들에서 벗어나 그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읽어나감으로써 읽히는 비평의 가능성을 여실히 증명했다. 故 이성욱 씨의 유고평론집 ‘길’(문학동네 刊)도 출간돼 그 현실적 문제의식을 여전히 뽐내면서 학계에 ‘애수’를 불러 일으켰고, ‘최인훈’만으로 장편평론을 펴낸 ‘해체와 저항의 서사’(문학과지성사 刊)도 소중한 성과였다.

동양철학계에서는 노자를 축으로 시공간적 넘나들기를 수행하는 두 명의 학자가 경합 국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떠도는 철학적 사유’를 강조하는 김형효 정문연 교수는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刊)에서 노자를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에이토스뿐만 아니라 근대의 하이데거와 한데 묶어 ‘상관적 사유’의 선에 놓았다. ‘사유하는 도덕경’이 노자에 대한 학문적 주석서라면, 김시천 숭실대 박사의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책세상 刊)는 노자를 삶에 대한 주석서의 위치에 갖다 놓았다.

사회과학계는 주춤한 분위기였지만 몇몇 걸물들을 쏟아냈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그린비 刊)은 ‘시대의 퇴물’로 매장돼 가던 마르크스를 담론 공간으로 재구성해 제출한 작품이다. 이 교수는 자본(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논리가 한계에 부딪힌 바로 그 곳에서, 자본을 읽어내야한다는 외부의 시선을 도입함과 동시에 대안까지 모색해 눈길을 끌었다.

강정인 서강대 교수의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아카넷 刊)는 극복 당위성만 제시된 채 후기구조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첩첩산중에서 맴돌던 ‘서구중심주의’라는 불투명한 실체에 옷을 입혔다. 강 교수는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정치사상적 고찰을 통해 ‘서구중심주의’에 ‘개념, 역사, 과제’로 구성된 구체성을 입힘으로써 ‘벗기고 새로 입히기’ 작업의 단초를 제공했다.

2003년 뮈르달 상을 수상한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부키 刊)는 역사적·이데올로기적 경제 읽기를 통해, 발등에 떨어진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이라는 급한 불이 사실은 선진국이 던져 놓은 함정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독일 역사학파의 대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화신이라 칭해지는 장 교수는 선진국들이 걷어 차 버린 사다리만 바라보지 말고, 시공간적 차이의 맥락에 주목하는 대안의 길을 찾도록 요청하고 있다.

 예술분야에서는 비록 논문모음집이지만, 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문헌과 미술을 한데 엮어, 불교미술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로 시선을 끈 장충식 동국대 교수의 ‘한국불교미술연구’(시공사 刊)가 올 한해를 장식했다. 이 책은 건축, 회화, 조각, 공예 등 미술사 연구의 전 분야에 대한 장 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이 덧붙여져 유익한 미술 읽기’의 전범으로 평가됐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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