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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 설초 선생님 2주기를 보내며
●부치지 못한 편지 : 설초 선생님 2주기를 보내며
  • 교수신문
  • 승인 2001.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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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청같은 목소리를 기억하렵니다"
스승의 날을 맞아 2년전 세상을 떠난 국문학자 설초 故 김준오선생을 추모하며 제자 남송우 교수가 그리움의 편지를 보내왔다.
남송우 / 부경대·국문학

지난 4월 4일 한식을 하루 앞둔 날 오후, 현대시학회 회원인 엄국현 교수, 박경수 교수와 함께 당신이 잠들어 있는 실로암 공원묘지를 찾았습니다.
공원묘지 입구에는 개나리가 한창이었고, 공원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은 연초록 봄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나목들이 새 생명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앞에 서서 묵념을 하고, “설초 선생님 저희가 왔습니다”하고 불러 보았지만, 당신은 묵묵 부답이었습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본향으로 영영 가신
당신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사람살이의 끝이 어디인지를 생각했습니다.
나무들은 새 봄 따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지만 당신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보기가 힘들어지면 자연 情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갈수록 그리움만 더해가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당신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계시지 않은 2년 동안 저희는 너무 많이 헤매고 다녔습니다. 당신은 한국현대시학을 새롭게 보는 눈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지만, 우리는 그 시선을 가지고 우리 시를 꿰뚫어 보는 일에 착념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한국문학 연구는 특정지역의 전유물이 아니고, 어느 지역에서나 잘 훈련받은 소집단들이 성실하게 연구만 한다면, 놀라운 성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당신은 제자들을 모아 현대시학회라는 소집단을 만들어 두 권의 연구서를 펴내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연구역량을 결집시키고, 성실히 연구를 실천한다면 새로운 연구결과를 선보일 수 있다는 하나의 상징적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것에 힘을 얻어 공부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었는데, 당신은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남들보다 학문의 길에 늦게 입문하셨지만, 남다른 열심으로 책과 씨름하며 공부하는 자의 진정한 자세를 보이셨던 당신이 너무 빨리 떠나셨기에 우리가 받은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현대시학회를 추스르고 당신과 나누었던 한국시학의 과제들을 하나 둘 풀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겨울잠에서깨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누운 묘소 앞에 서서 실로암 공원묘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무덤들을 바라보며 스승의 사랑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랑을 말입니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챙기고,그들의 삶을 걱정하던 당신의 음성이 다시 들리는 듯 했습니다.
간경화로 입원해 계실 때, 우리가 문병 갈 때마다 취직 못한 제자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염려하던 모습이 선합니다. 힘이 없어 당신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면서 제자들의 생활과 미래를 염려하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는현실을 살면서 더욱 당신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모여서 공부를 하고 공부가 끝나면 언제나 격의 없이 함께 놀이판을 벌이던 그 시간들이 애타게 그리워지는 것은 또 웬일입니까? 이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실로암 공원묘지를 내려오며,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는환청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참된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는 단호한 목소리였습니다. 스승의 그늘에 기대어 살지 말라는 경고의 목소리였습니다. 스승이 이루지 못한 부분을 이루어 달라는 간청의 목소리였습니다.그 목소리를 가슴에 담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당신이 남긴 학문의 성과들을 그대로 보존만 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이 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개척해 놓은 길을 더 넓히고 닦아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터닦아 놓은 기초 위에 든든한 집을 세워나가겠습니다.
당신이 개척해 놓은 터를 더욱 갈고 닦아 흔들리지 않는 한국시학의 집을 지어가겠습니다. 그 집에서 우리가 가르친 또 다른 제자들이 당신의 체취를 느끼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스승의 날을 맞으며 이 약속을 한 송이의 꽃으로 당신의 영전에 바칩니다.
제자들 걱정은 이제 접으시고 편하게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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