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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_안은미의 '렛츠고'
무용비평_안은미의 '렛츠고'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4.1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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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공간의 심미적 대화...포괄성에서 멈춘 도약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무대에는 늘 판타지가 등장했다.

그는 분홍의 베이스에 빨강-초록의 보색대비로서 초현실의 인공낙원을 건설하곤 했다. 그것은 폭력적 질서의 세상에 대항하는 안은미 특유의 방법이었다. 샤머니즘과 몽상을 통한 상징적 해결이라 해도 그것이 삶의 편인 한, 부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안은미가 토플리스 차림(상의는 드러내고 하의만 걸치는 것)으로 독무를 출 때면, 그 모습이 항상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젖가슴에서 은유되듯 狂女인 동시에 대지모신, 또한 이미 상처받은 여인인 동시에 아직 순박한 처녀. 하지만 낙원에서도 비극의 그림자가 온전히 지워지지는 않았고, 그때의 춤은 다시 한번 체념과 낙천성을 통해 생명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한바탕의 춤을 통해서, 춤의 향연을 통해서 세계 체험의 의미를 환기시키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실패로 끝날 운명의 춤일지라도.

그런데 지난 10월 22일 국제공연예술제에서 만난 안은미 신작 ‘렛츠고 Let's go’에는 오랫동안 그가 지속해왔던 휴머니즘의 취향도, 낙원의 내러티브도 모두 없었다.

대신 심플하고 반복적인 춤이 통제된 도구상자 같은 공간과 어떻게 접촉하는지를 실험하는 미학적 탐문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이것이 지나치게 미시적인 관심으로 흘러버린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그런 징후는 안은미가 국내에서 활동하던 마지막 무렵, 일련의 ‘Please…’ 시리즈에서 다소 감지되기도 했다. 그것은 동서의 문화가 통섭되는 복합문화주의, 다인종 무용수들로 구성된 몸의 질감의 활용, 그리고 절제된 춤의 새로운 모색 등등이다.

특히 ‘부디 내 손을 잡아주오 Please hold my hand’와 가장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 작품에는 여전히 금기를 위반하는 과잉의 에너지, 도저한 유희정신이란 안은미의 고유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일상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차용해 기발한 유희의 무대로 바꾸는 그의 안무는 독일 현대무용의 기수 피나 바우쉬의 감탄까지 자아냈었다.

 “은미, 여기는 몹시 지루해. 와서 뒤집어줘.” 라고 피나의 충동질에 독일로 날아갔던 안은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렛츠고’의 무대는 다인종 무용수들의 몸의 질감이 극대화된다. 토플리스의 이들 무용수들은 팽팽한 검은 치마를 입었는데, 이것은 지난 ‘2004 모다페’에 참가했던 자비에르 르 로이의 작품 설정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하지만 안은미는 좁은 치마폭에 걸린 압도적인 긴장감에서 단숨에 자신의 장기로 넘어간다. 즉, 검은 치마를 끊임없이 뒤집어쓰는 것이다. 그 치마 속의 색깔은 분홍을 기조로 한 안은미의 원색 스펙트럼이다. 서유럽의 무용수와 아시아의 무용수가 이 색깔들에 휩싸여 순식간에 모두 ‘심청’이 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러한 ‘심청’ 놀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는데, 그 원색의 노출도 필연적으로 건조해진다. 맥락의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복의 취향만이 득세하고 있어서 미시적인 음미의 수준에 머물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색은 샤먼적인 에너지의 차원이 아니라 매우 소소한 놀이의 차원에서 해소된 셈이었다. 또한 안은미는 이들 무용수들의 몸을 물상화 하는 것 같다. 매우 엄밀한 실험 공간으로서의 도구상자가 구성하는 무대는 파랑, 초록, 빨강 계열의 빛으로 바뀌는 것으로 디자인됐다. 그러자 이 무대 바닥과의 관계 설정을 염두에 둔 듯한 무용수들은 제자리 뛰기, 네 발로 걸으며 질주하기, 머리를 휘감고 도는 웨이브 동작, 서로 안고 넘어지기, 천천히 뒤로 구르기 등의 동작 단위들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그 파편적인 단위들의 반복 과정에는 일정한 패턴이 실제로 작용하는 듯한데, 혼란스럽게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무대와 음악의 접촉 역시 미시적이다. 경쾌한 가야금 속주가 낳는 일렉트릭 음악 같은 기이한 속도감이 이 ‘매트릭스’ 공간을 지배한다. 가끔씩 한국적인 타악이 섞여들어 동작정지와 호흡 사이의 긴밀한 교섭을 중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녀의 누드가 무대를 가로지르는데, 그것은 물상의 전형적인 느낌을 자아낼 뿐이다. 심지어 남녀가 달라붙어 성적 포즈를 취할 때조차 이상하게 섹슈얼리티의 감각은 좀처럼 연상되지 않는다. 이것이 안은미가 통제하는 도구상자의 권능인 것일까.

다만 임계점에 다다라 기대할 만한 새로운 질적 변화 대신에 끊임없이 반복된 춤과 퍼포먼스의 효과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포괄적인 춤들의 만개로서 다소 엿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안은미가 일관되게 견지했던 독특한 휴머니즘의 색채가 상당 부분 탈색되고, 기능주의적 실험을 벌이는 것이 퇴행은 아닌가. 플리즈 시리즈에 나타난 피범벅의 세례 속에서도, 난행의 암시 아래에서도, 만유와 들러붙는 혼음의 무아경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구원이 절망의 몫을 더 키웠던 것일까.

그가 사회적 결격을 극복하기 위해 차용했던 유희정신의 실종은 크게 느껴진다. 일찍이 이념적으로 아방가르드를, 방법적으로 키치를 내세우며, ‘깊이의 형이상학’과 ‘내면의 어둠’이라는 표현주의의 말폐적 현상을 타파했던 안은미에게 ‘렛츠고’는 어떤 터닝포인트의 실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 현대무용의 개성적인 미학을 구축했던 그가 자신의 기존 장점들을 접어버리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상의 차용’, ‘놀이정신의 극한’, ‘제의의 현대적 수용’ 등은 한국의 춤의 여전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김남수 /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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