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조선에는 이러한 분청사기나 백자를 만든 사기 장인들은 있었지만 ‘도예’작가는 없었다. 17세기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도예 작가가 등장해 회화적인 개성 표현을 맘껏 펼칠 수 있었던 일본과는 애초부터 차이가 있었다. 또한 조선말기까지도 수공업 생산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관계로 기계화된 생산 설비를 갖춘 일본이나 다양한 그릇 생산에 성공했던 중국과는 ‘산업’의 측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20세기 들어서 기계화된 제작방식이 도입되고 鮮展등이 개최돼 공예가로서의 도예가가 등장했지만 일본인들에 의해 이뤄진 타율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한일 국교 재개가 이뤄지고 서구 도예가 소개되면서 우리 도예계는 크게 세 부류의 집단으로 나뉘게 됐다. 첫째는 일본인들의 구매 취향에 맞게 고려청자나 조선 분청사기, 백자 등을 그대로 모조하는 소위 ‘전통도예가’들이고, 둘째는 실생활 용기들을 기능에 맞게 디자인해 대량생산에 주력하는 ‘산업도예가’며, 셋째는 미술대학 도예과 출신들을 중심으로 작가의 개성 표현을 흙이라는 매체를 사용해 표현하는 ‘현대도예가’였다.
이들의 출현과 활동을 보면 상당한 시대적 당위성과 功過를 지니고 있지만 오늘날 새로운 전통의 창조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김익영과 윤광조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도예 장인으로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조선’을 표방한 ‘新朝鮮’
김익영은 원래 공학을 전공했던 도예가다. 그러한 그의 배경은 우리 전통 그릇의 대량생산을 이룩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백자다. 각종 제기, 푼주, 반상기, 합, 다기 등이 별다른 문양 장식이나 현란한 조각기법 없이 형태와 색으로만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누가 봐도 그의 작품 세계는 조선백자의 작품세계와 닿아 있는 듯 보인다. 조선백자가 주문계층인 양반 사대부나 왕실의 취향과 품격을 대변했다면 그의 작품에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온화한 귀족들이 느껴진다. 그런 까닭인지 그의 작품에는 소박한 조선 그릇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항아리와 푼주가 있고 비대칭의 현대화된 백자들이 있어, 또 다른 모색의 시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익영은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도예 개인전을 열고 대학에서 오랜 기간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잊혀져 가던 백자 반상기를 오늘에 재현해 작품성과 상업성이 공존할 수 있는 여력을 보여준 것은 그의 40년 陶歷에서 나온 필연의 산물이다.
‘脫朝鮮’을 표방한 ‘조선’
그림에 미치면 어떻게 되나
김익영이 곱상한 조선 여인의 피부 같은 백자를 대량제작하고 이를 우리네 안방에 강제로 보급하는데 성공했다면, 윤광조는 투박하지만 가장 처절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또한 미친듯이 도자기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우리 전통에서 그 창조의 힘과 작가정신을 찾아냈다는데 있다.
그럼에도 김익영과 윤광조의 작품들이 위와 같은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현대화된 생활공간을 고려할 때 기능성과 색상에서 부분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고 다양한 소비 계층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디자인의 한계를 너무 쉽게 노정하는 치명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다. 더구나 모든 도예가가 그들처럼 될 수는 없으며 또 되어서도 안 되는 점에서 후학들에게 선택을 망설이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정체성의 늪과 현대와 서구라는 도그마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 도예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김익영과 윤광조는 일부나마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해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방병선 / 고려대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