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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배경이 된 나를 생각하며
다른 이의 배경이 된 나를 생각하며
  • 류동민 충남대
  • 승인 2004.12.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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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_기억의 사진첩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간다. 나는 오늘 이런저런 약속과 메모가 어지럽게 적힌 탁상용 캘린더를 2005년도 판으로 바꾸고 있다. 그 곳에는 올 한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년 12월부터 내가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 참석하기로 했던 모임들의 이름 따위가 빼곡 차 있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일본의 고베대학 경제학부에 외국인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내가 미국이 아닌 일본, 그것도 대부분의 한국 연구자들이 선호하는 도쿄대학(또는 간사이 지방에서는 교토대학)이 아닌 고베대학에 간 이유는 딱 하나,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자 오키시오 노부오(置鹽信雄)가 졸업하고 평생을 재직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키시오는 ‘오키시오 정리’라는 유명한 수학적 명제를 1960년대 초반에 발표했고, 평생에 걸쳐 2백여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던 인물이다. 나는 당연히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일본으로 떠났지만, 그가 3년째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사실을 도착한 뒤에야 알았다. 작년 11월 초 오랜 병원생활과 혼수상태 끝에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삼십대를 마감하는 날이라는 개인적인 소회까지 겹쳐 어수선하던 작년의 마지막 날, 나는 오키시오의 제자며 고베대학 교수인 나카타니 다케시(中谷 武) 선생 부부와 함께 오키시오의 무덤(?)을 찾았다. 일본인의 장묘관습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성묘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길을 떠났지만, 다다른 곳은 뜻밖에도 그가 생전에 이사해놓고 얼마 살지도 못했다는 고베시 외곽의 좁은 고층맨션이었다. 그 곳에서 역시 경제학자인 그의 딸이 보여준 사진첩은 1995년 오키시오가 한국사회경제학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을 담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연구자가 조문을 온다는 소식에 그때 함께 한국에 왔던 그의 딸은 미리 사진첩을 꺼내 놓고 기다리고 있었고, 틀림없이 그 수십 여장의 사진 속에 내 얼굴이 담겨져 있으리라고 믿는 눈치였다. 오키시오 선생의 노부인과 딸, 역시 고베대학 교수인 사위, 그리고 나카타니 선생 부부가 궁금해 하면서 식탁위의 사진첩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아내어 ‘존재증명’을 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 내 모습은 담겨져 있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앉아 있던 위치가 사각이었기 때문이거나, 갓 학위를 마친 초년병이라 청중들의 뒷구석 정도에 파묻혀 있던 탓이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진첩 속에는 나의 선생님, 선배, 후배, 동료들의 십여 년 전 모습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의식적으로 오키시오 선생과 함께 포즈를 취한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강연장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배경처럼 찍힌 경우였다. 나는 문득 이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이 이 사진첩에 담겨져 있는 것을 알기나할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엉뚱한 생각은 꼬리를 물고 뻗어나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어느 곳엔가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첩 속에 나도 모르는 채로 담겨져 있을 내 모습들은 어떤 것일까라는 데로 발전했다. 이제는 이름도 잊은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5.16광장(지금 몇 살 정도의 한국인이면 이 이름을 기억할까?)에 소풍가서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어느 여름날 놀이동산에서 찍은 상기된 모습의 내 얼굴사진, 그 옆에서 우연히 사진을 찍고 있었을 내 또래 꼬마의 사진 속에 담겨졌을지도 모르는 내 모습들. 사진은 그렇다 치고, 나를 알았거나 알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의 사진첩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나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무거웠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찍는 사진이 다소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도 아마도 그 무렵부터였던 듯하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자신을 정당화면서 기억을 재구성하곤 한다. 내 머릿속에서 편리하게 재구성되어 있는 수많은 지인들의 모습, 그것은 또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또 한 해를 넘기면서 사진첩과 기억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 본다.

류동민 / 충남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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