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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비평 : 황종연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을 비판한다
담론비평 : 황종연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을 비판한다
  • 하정일 원광대
  • 승인 2004.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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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문학의 功過 먼저 검토해야...'만인보', 민중민족문학의 대표성 떨어져

하정일 / 원광대 국문학

'문학동네' 겨울호에서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을 통해 고은의 '만인보'에 나타난 민중민족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한 황종연 동국대 교수(국문학). 황 교수는 고은 비판을 통해 민중민족주의 일반의 문제점까지 짚고 '개인의 숭고'에 대한 섬세한 탐색이 민주주의를 심도있게 사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황종연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은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 문학인이 오랜만에 내놓은 진지한 제언이다. 1990년대 내내 민중-민족 담론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지만, 정작 그것을 민주주의의 본질과 연관시켜 사유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민중-민족 담론에 전체주의니 파시즘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조리 있게 밝힌 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민중-민족 담론 비판이 대개 사적 개인을 특권화하거나 문학을 신비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고, 문학이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제시하지 못했다. 90년대에 벌어진 문학의 주변부화는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른 대중사회의 출현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문학의 사회적 발언권이 약해진 것도 중요한 내적 요인이었다. 사회적 발언권의 약화가 9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문학의 적극적 개입이 사라진 사태와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은 사실 문학의 주변부화라는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물론 이 말이 문학인들도 열심히 사회운동에 참여하라거나 이런저런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라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관점에서 사회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종연 교수의 글은 문학 본연의 사회 참여의 좋은 사례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황 교수의 견해는 자유주의 일변도의 위험한 시각을 담고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농후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래서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 同學으로서 황 교수의 이번 글을 계기로 민주주의에 대한 문학인들의 토론이 확산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논문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1988년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만인의 삶에 대한 시적 기록'이란 뜻으로, 고은의 시 작품 가운데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짝을 이루는 대형 연작시이다. 1986년부터 책으로 간행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알게됐던 가족, 친지, 이웃들에 대한 인상을 시로 옮기는 작업에서 시작, 역사 속의 인물로 지평을 넓혀 고주몽, 이황, 정여립, 김구, 걸인 독립단 등을 다루기도 했으며, 머슴 대길이, 따옥이, 화양댁, 땅꾼 도선이처럼 이름없이 살다 간 민중들의 삶의 애환도 기록했다. 2004년 출간된 16~20권은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묶이며, 크게 식민지시대-해방공간-한국전쟁 전후의 인간군상을 다룬다. 격변의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 가운데 '김일성', '이휘소', '이승만', '선우휘', '임화', '노천명'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야만의 상황 아래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끔찍한 장면들이 시인의 냉정한 시선 아래 그려진다. 김병익은 <만인보>라는 민족사적 벽화를 통해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고 그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만인보'의 민중적 민족주의에 내재한 한계에 대해서는 황 교수의 비판과 전반적으로 의견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만인보'가 1980년대 민중적 민족주의의 공과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글이 80년대의 민중-민족 담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면 고은보다는 황석영이나 김남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좀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당대 최고의 성취를 대상으로 한 비판만이 논의의 보편타당성을 보장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는, 몇몇 논자들이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사실상 당대 최고의 성취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황 교수의 '만인보' 비판이 80-90년대 민족문학의 대표적 성과에 대한 비판으로 오인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어째서 '만인보'를 택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듯싶다. 황 교수가 '만인보'를 근거 삼아 민중-민족 담론을 비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또한 90년대의 민중-민족문학을 비판하는 것이 글의 목적이었다면 90년대 자유주의문학의 한계도 함께 논했어야 좀더 균형 잡힌 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90년대는 황 교수의 진단처럼 민중-민족문학이 퇴조하고 자유주의문학이 활황을 누린 시대였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문학의 공과를 따지는 일이야말로 지금의 시점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고찰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200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을 따져보는 사유의 계기로 '만인보'는 그다지 적절한 대상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황 교수의 시각과 관련해 제일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율적 개인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다. 이미 많은 논자들이 자율적 개인이라는 관념 자체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가상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필자 역시 ‘개인의 존엄에 대한 승인’이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이라는 황 교수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자율적 개인’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심각한 위해가 된 적이 적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맑스의 말마따나 ‘자율적 개인’이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바탕의 하나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자율적 개인이라는 관념은 사적 소유의 인정을 근거로 해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자유주의에서 개인의 자유 옹호와 시장 옹호는 서로 얽혀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 발전을 제약하는, 현대 시장사회 내의 착취와 압제의 관계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는 정도로 대충 넘어갈 사안이 결코 아니다. 자율적 개인의 관념에 바탕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본질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롤즈가 '정의론'에서 ‘평등한 자유’를 재삼재사 강조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자율적 개인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무제한적 보장을 전제로 하는데,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자유의 불평등이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상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이 자유를 독점한다는 데 자유주의의 근본적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유의 평등성이 관건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평등한 자유를 지향하는 순간 개인의 자유는 불가피하게 제한되기 마련이다. 루소나 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조차 ‘일반 의지’나 분배의 공정성을 중시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황 교수의 글에는 자유주의의 이러한 본원적 한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듯하다.

 계급, 민중, 민족 같은 범주들은 바로 자유주의에 부족한 개인의 사회성 또는 자유의 공공성에 대한 자각의 산물이다. 민주주의는 자율적 개인이나 자유의 관념만을 기초로 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내용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 평등을 포함한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민주주의 발전사의 주요 축을 이루는 것은 그래서이다. ‘자율적 개인’으로는 이 문제를 개인의 선의나 인격에 맡길 수밖에 없다. 사회 계약론적 해결책 역시 궁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계약 당사자들간의 힘의 불평등한 관계가 제거되지 않고서는 그 사회 계약이란 것이 힘센 자에게 유리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나 민족 같은 집단적 주체를 세우지 않고서는 이러한 비대칭적 역관계를 해결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계급, 민중, 민족 등의 집단적 주체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원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근대적 개인들의 결사체라 할 수 있다.

  물론 80년대의 민중-민족 담론이 획일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면모를 노정한 것은 사실이다. 황 교수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당시의 민중-민족 담론은 민중의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정체성, 곧 복수의 정체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백낙청 교수의 민중-민족 담론처럼 민중의 유동성과 민족의 양면성에 주목한 이론들도 존재했음을 빼놓고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따지고 보면, 해방직후에 임화가 계급 대신 ‘인민’을 내세운 것도 계급의 사회적 연관에 대한 인식의 소산이다. 백낙청 교수가 소장파의 계급론에 맞서 민중 개념을 끝내 고집한 것도 마찬가지다.

황종연 교수의 설명처럼 민중은 ‘공백의 기표’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민중-민족 담론이 ‘퇴락의 운명을 90년대 이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민중이 ‘공백의 기표’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오히려 민중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데서 찾아야 한다. 계급은 생산관계에서의 주체 위치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에 비해 민중은 계급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 속에서 드러나는 양태를 뜻한다.

▲고은 시인은 국내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후보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
요컨대 사회구성의 그때그때의 단계와 국면마다 계급이 사회적으로 구현되는 방식은 다르기 마련이며, 계급의 그러한 사회적 연관의 유동적인 양태를 일컬어 민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은 대단히 전략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진보와 보수가 민중의 내포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민중을 어떻게 專有하냐에 따라 사회의 향방에 관한 헤게모니 투쟁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민중이 민족주의에 의해 획일화되고 단순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민중 개념의 본원적 한계 때문이 아니다.

  민족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인보'에서 민족에 대한 목적론적 인식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민족주의가 개입한 결과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와는 별개로 제3세계의 민족은 피식민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된 결사체이기도 하다. 민족이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체인 까닭은 민족적 지배와 착취가 피식민 개인의 존엄을 부정하는 실존적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피식민 상태의 개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으로의 자발적 결사를 통해 억압에 저항한 것이다. 더구나 80년대 한국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중이 민족을 전유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내부로부터 극복해가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령 김남주의 시가 그런 예에 해당할 터이다.

김남주의 시는 민족적 억압이 어떻게 개인의 존엄을 부정하는 실존적 조건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이 어째서 민중-민족이라는 집단적 주체를 통해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황 교수의 글은 80년대 민중적 민족주의의 역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보인다. 탈식민(postcolonial) 시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이 보다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국면을 맞이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말이 민족적 지배와 억압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탈식민 시대에 걸맞는 전지구적 전망에 바탕해 민족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필수불가결하지만, 민족 개념을 폐기하는 방식으로는 신자유주의가 꿈꾸고 있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제국주의체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렇게 보면, 민중-민족은 결코 개인과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적대적 관계를 굳이 따진다면 사적 개인과의 관계가 그러할 터이다. 사적 개인이 다원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존재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민중-민족은 다원주의와도 대립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물론 이는 다원주의가 ‘평등한 자유’를 존중하는 이념일 경우에 국한된다. 만약 황 교수가 생각하는 다원주의가 무제한적 자유를 용인하는 이념을 뜻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아정체성의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연관들을 헤아리고, 집합적 정체성들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황 교수의 제안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민중과 민족의 재구성-폐기가 아닌-역시 그러한 견지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제안이 진정성을 지니려면 다원주의에 대한 구체적 상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황 교수가 말하는 다원주의가 사적 개인의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것인지 아닌지를 설명해야 한다. 만약 황 교수가 강조한 자율적 개인이 자유주의가 특권화시킨 사적 개인과 동일한 것이라면 그때의 다원주의란 시장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럴 때 다원주의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적이 된다. ‘평등한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원칙마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라든가 근대적 주권을 논한 대목들도 많은 논쟁거리를 담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황석영이나 김남주의 문학을 통해 민족문학이 민중-민족-개인의 사회적 연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필자는 연세대에서 ‘해방기 민족문학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3세계 민중의 시각과 민족주의의 내적 극복’, ‘80년대 민족문학:탈식민의 가능성과 좌절' 등의 논문이 있고, ‘분단자본주의시대의 민족문학사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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