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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비평: 주체적 학문을 찾아나선 두 갈래의 길
담론비평: 주체적 학문을 찾아나선 두 갈래의 길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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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성'의 역기능 비판해…양극적 논의 아쉬워

최근 학문의 주체성, 자생성에 대한 논의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여러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다보니 주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도 갈리고, 이른바 ‘사이비’ 주체성 혹은 ‘도로아미타불’ 주체성의 논의들도 간혹 눈에 띈다. 남에게 기대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오직 나의 언어에만 몰입시키고, 이 땅을 얘기해야한다는 당위가 먹음직스러운 외국 이론에 대해서도 입맛이 떨어지게 하는 역효과도 영 없지는 않은 듯하다.

마침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이런 문제의식을 첨예화시킨 글이 한편 실렸다. ‘주변부 의식을 넘어서’라는 특집에서 문학평론가 김태환 씨가 ‘세밀하게 읽기-학문적 주체성을 찾아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번 특집은 한국사회의 중요한 특징인 중심에 대한 콤플렉스와 숭배, 중심에 합류하고자 하는 강박적 욕망 등 ‘주변부 의식’에서 벗어나야 주변부란 현실상황도 완화되지 않을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실린 김태환 씨의 글. ©
김태환 씨는 우리사회의 식민지적 예속성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곳이 ‘학문’ 영역이라고 하면서, 해외유학파 우대, 국내논문 미인용 등 국내 대학이 학문 후속세대 양성의 기본적인 역할을 거의 포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내용이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교수신문의 ‘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기획이 독자적 이론의 가능성을 탐색했음에도 일종의 ‘주변부 의식’의 산물이 아닌가 라는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이유는 학문적 예속성을 자생이론이 왜이리 없냐는 식의 ‘신세한탄’으로 몰아갈 경우 학문적 예속현상의 여러 측면이 ‘자생성’이라는 식물학적 비유와, 수용과 창조 같은 단순 이분법으로 환원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김 씨는 문제를 달리 보자고 권한다. ‘세밀한 읽기’의 부족이 예속성의 한 원인이라고 말이다. 그는 이것을 로만 야콥슨의 유명한 논문 ‘문법의 시와 시의 문법’의 한국어 번역을 예시로 삼아 풀어간다. 김 씨에 따르면 문제의 번역은 “both life is good, and it is good to live”라는 구절을 “두 삶은 좋다. 그러니 사는 것은 좋다”라고 옮기고 있다. “both A and B”의 용법을 놓친 오역인 셈이다. 이걸 바로 잡으면 “삶도 좋고, 사는 것도 좋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야콥슨은 “이 두 개의 대등절 사이에서 어떤 인식상의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라고 이어 말했다. 그러나 역자는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김태환 씨는 “적어도 이 시점에서 번역자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라고 비판한다. 앞 번역문이 뒷문장과 의미상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뭔가 있겠지’라고 대강 넘기지 말고 거슬러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자는 이를 무시했고, 심지어 어떤 구절에서는 ‘as’를 ‘∼로서’로 해석한 다음 같은 문장에 있는 ‘same’을 처리하지 못해 은폐시키는 무책임함을 저지른다.

김 씨는 로만 야콥슨이 알려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이런 사례로 볼 때 제대로 수용됐다고 보기 힘들다며 “이론의 생명은 세부에 있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외국이론을 대하는 한국 인문학자들이 대부분 “나는 이 이론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라는 예속성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호소력을 갖는다. 오늘날 대화와 소통의 어려움은 타인의 글에 대한 세밀한 읽기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씨는 갑자기 조동일 교수의 세계문학사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조 교수의 작업이 “대개 영어로 서술된 각국 문학사의 통사에 근거해 이뤄진 체계화 시도일 뿐이라 큰 설득력이 없다”라는 것.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이해와 이론의 지평을 확장해가는 일에 무관심하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점에서 ‘세밀함’이란 잣대의 이런 적용은 일종의 ‘범주 오류’가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 연합뉴스
우연찮게도 지난 11월 26일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는 가톨릭대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 기조강연에서 ‘학문론을 강의하자’라는 글을 발표했다. 조 교수의 글은 “집에 방이 있으면 거실도 있어야 한다”라는 논리로 요약된다. 집은 전공분야고 거실은 학제적 영역이다. 그에 따르면 거실을 다루는 건 ‘총론’이고 학문론이다. 그것의 임무는 “관계를 밝히는 것이고 그러려면 취급대상들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중심에 설 자격을 갖춘 사람은 흔치 않다. 조 교수는 자신이 대학을 옮기며 고전문학, 현대문학, 문학사 등 다양한 세부전공을 옮겨다니며 강의를 했고, 그 전공의 학문적 정체성을 그 때마다 고민해 글로 썼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 “학문론을 강의하게 해줄 대학을 찾는다”라는 공개구직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세밀한 읽기는 이 행보의 진정성을 읽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조 교수는 학문은 가르치는(學) 사람과 묻는(問) 사람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효용과 기능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그가 대학원생들과의 상호소통적 강의를 통해 스스로의 학문을 심화시켜온 경험적 역사에 토대를 둔 발언이다. 가령 “전공이 다른 이들이 무관히 지내다 일시에 모여 연구하는 학제간 연구를 나는 불신한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는 걸 보지 못했다. 다른 분야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자기 연구를 확대해가지 않고서는 진정한 공동작업이란 있을 수 없다 ”라는 그의 발언은 학문학의 필요성을 학계의 대표적 고질병을 바로잡기 위한 것에서 찾아내고 있어 큰 설득력을 가진다.
아마 김태환 씨는 조 교수의 평소 지론인 ‘수입학’과 ‘시비학’을 넘어 ‘창조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행사해온 도그마적 역할을 염두에 둔 듯하다.물론 대학에 학문학 학과 개설을 주장하는 부분, 학생들과의 토론을 통해 자신의 강의원고를 보충해 책으로 내겠다는 부분이 조 교수의 발제문에 들어있는데 솔직히 말해 “학부생과의 소통”이 얼마나 생산적일 지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철학이 현재의 무기력함을 벗어나 효용성과 경쟁력을 갖추려면 학문학에 대한 도전을 통해 가능하다는 충고도 일견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빈틈이 들여다 보인다. 문제는 이런 틈새들이 ‘학문학’이란 문제제기가 갖는 시의적절함에 비해서는 매우 사소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조 교수가 ‘창조학’에서 벗어나 ‘학문학’이란 영역으로 옮겨왔고, 그 옮겨옴이 현실의 변화를 주시해오면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에 대해서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물론 김태환 씨는 ‘학문론’ 발제문을 읽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세계’와 ‘창조’의 전도사로서 조 교수에 대한 기억을 ‘세밀한 읽기’의 설득력을 높여주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으로 불러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태환 씨 글의 문맥으로 다시 돌아와볼 때 그가 조 교수의 글을 접했던들 그 비판적 태도가 크게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세밀한 읽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의 우선적인 구체적 실천의 방법으로 ‘번역’이라는 장르를 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번역이 야콥슨 같은 사람들의 책을 재번역하는 일인지, 아니면 번역된 책들을 꼼꼼히 비판하자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번역하는 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재번역이라면 고전 이론의 현재성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고려가 된 채 ‘번역’이 선택됐다는 점을 그의 글 결말 부분을 읽으면서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김 씨는 “번역행위를 통한 이론의 올바른 수용”이라는 것으로 ‘세밀한 읽기’라는 중요한 문제제기를 등치시키고 있을 뿐이라 “번역에서의 세밀성의 강조” 차원의 논의로 머문다. 물론 ‘세밀한 읽기’만으로도 훨씬 많은 점들이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번역문체론, 의역·직역의 유형, 번역가의 조건, 번역과정(참조텍스트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교환), 번역에 주어진 시간, 공동번역의 문제점 등 실제로 한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번역문화에 대한 구체적 검토의 필요성과 그런 검토과정을 통해 번역행위 자체가 담론화되고, 그 결과가 매뉴얼북으로 출판될 필요성이 전제되지 않은채 ‘번역’이라는 걸 강조하는 일은 원론에서 맴도는 것 같아서 아쉽다. 결국 그가 말한 ‘자생성’과 ‘창조성’이 다른 예속적 징후들을 환원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지적한 것을 그가 반복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 영역에서의 세밀한 읽기는 사실 ‘번역’ 차원보다는 한국어로 기록된, 그리고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잘 읽히지 않는 그 수많은 평문들에 적용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생성’이든 ‘번역’이든 그리고 ‘창조학’이든 ‘학문학’이든 오늘날 괜찮고 그럴듯한 문제설정들은 그 내용과 함께 지나친 일반화 및 헤게모니화도 함께 두려워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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