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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문득, 사이 너머 그림
흔들림, 문득, 사이 너머 그림
  • 강수미 홍익대
  • 승인 2004.11.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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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김호득 展

어떤 그림 앞에서는 ‘말’이 멈추고, 그와 동시에 ‘머리로 하는 사고’가 정지한다. 김호득의 그림을 두고 해 보는 ‘생각’이다. 말과 사고는 멈췄는데도, ‘감상자’로 내가 서 있는 이 곳의 시간은 ‘흔들림, 문득.-사이’ 그림 속 붓 획의 결들이 흐르는 시간처럼 잘만 흘러간다. 그래서 ‘생각’이라 했지만, 이 때 생각은 김호득 그림에 대해 事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그 그림에 대한 말(비평)은 지금은 부재하는, 때문에 회상적일 수밖에 없는, 그림 앞에 섰을 때의 감각 경험에 대한 수사에 불과할 것이다. 벙어리가 되어, 벌거벗은 몸 그 자체가 되어 나는 김호득의 그림에서 무엇을 봤던가. 혹 나는 그 때 ‘그림의 공간’이라는 것, ‘그림의 시간’이라는 것을 봤던 것은 아닐까.

‘문학의 공간’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림의 공간’이라는 것도 있다. 문학의 공간이 문자언어들의 의미(를 향한/로 부터/에 대한) 흔들림이자 저자와 독자 사이에 진동하는 해석 공간이라면, 그림의 공간은 육체로부터 솟아난 필획들의 이미지(로의/에 저항하는) 흔들림이자 화가와 감상자 사이에 ‘순간’ 발생하는 감각공간이다. 김호득의 회화를 논하면서 굳이 문자언어 예술인 ‘문학’을 끌어들이는 것은, 반복되지만 그 그림들이 강제하는 말의 멈춤, 해석의 정지, 즉 反독해성 때문이다. 그림들이 갖고 있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감상자를 입 다물게 하는 김호득 회화의 ‘특질’이 여기 있다. 모든 감각적 경험들이 해석되기를 갈망하고, 해석과 동시에 목적에 따라 사용되기를 욕망하는 이 고도 경제 테크놀로지시대에, 김호득의 그림들은 오히려 점점 더 해석 불가능의 공간으로 접어든다.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으로 용도 변경될 수 없는 ‘절대 그림’의 공간으로 깊숙이 침잠하는 듯 하다. 김호득의 근래 회화가 ‘절대 그림’으로 잠겨든다는 나의 주장은, “나는 한번도 그림을 의심해 본적도 없고, 내가 화가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적도 없다”라는 이 화가의 말이 보증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서 어떠한 ‘무엇을 그리기’도 발견할 수 없고, 오로지 ‘그리기를 한 것’만을 더듬을 수 있었던 내 미적 경험이 예증한다. 그림과 자신에 대한 김호득의 소박하지만 단호한 언급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무엇일 것인지, 감상자에게는 또 무엇이 될 것인지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흔들림, 문득’ 연작에서 유일한 표현인 점찍기, 선긋기를 화가의 “정직함”으로 연결시킨 정헌이 교수의 통찰(2002년 일민미술관 김호득展 서문)도 여기―화가를 보는 감상자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일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사에 있어 ‘회화성’이라는 것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제대로’ 추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여기의 회화는 개인적 에피소드 혹은 유희 표현의 장이거나 스펙터클 시각이미지의 곁다리가 되어 바로 그 ‘회화’라는 것을 소외시키고 있다. 한 때 김호득 또한 이러한 상황의 물에 자신의 그림을 놓아 보기도 했던 듯 하다. 물론 맥락을 철저히 더듬을 경우, 전혀 다른 ‘김호득 회화 내러티브’가 가능하겠지만, 그가 예컨대 지난 일민미술관 전시에서 그림을 바닥에 띄워 놓는다거나, 마로니에 미술관 기획전에서 여러 폭의 먹그림을 천장으로부터 수직으로 늘어뜨려 놓았던 것은 이번 이중섭 미술상 수상 기념전과 견줄 때 그림 外적인 관심이 부수됐던 것으로 보인다. 예로 든 전시에서 그의 그림은 전시 방식과 더불어 해석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그림의 공간’이 아니라 ‘그림이 속하는 물리적 공간’이 現示된 작품들이었다. 이 때의 ‘흔들림’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대기 속에서 만드는 흔들림으로 느껴졌고, 이 때의 ‘바람’은 먹물 머금은 筆이 찍히고 겹치는 가운데 일렁이기보다는 관람자의 눈앞에서 물리적으로 일었다. 그러나 이번 수상전에서 그의 그림들은 모두 벽으로 돌아갔으며, 완전히 對自적이 되어 ‘있다’. 진리 있음이 “존재자의 숨어있지 않음”이라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원용해서 김호득의 ‘흔들림, 문득.-사이’를 말해 볼 경우, 이 그림들은 ‘회화(존재자)의 숨어있지 않음’ 상태로 우리에게 온다. 우리는 무심한 듯 흐르는 점들의 결 밖에서, 단호하게 그어진 두터운 먹 선의 겹침 바깥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그림 존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이 열어주는 ‘그리기의 순간’에만 잠깐씩 들어설 수 있을 뿐이다. 가령 먹이 시간차를 두고 겹쳐져서 만드는 미세한 화선지주름의 반짝임을 발견했을 때. 아! 화가가 이렇게 겹쳐 그렸구나.

이렇듯 김호득의 ‘흔들림, 문득.-사이’는 시간성이 결여된 것만 같은 회화영역에도 엄연히 시간이 흐름을 깨닫게/느끼게 한다. 이것이 내가 그의 그림에서 지각한 ‘그림의 시간’이다. 오래 다듬어야 제 빛을 내는, 그래서 결국 견고하게 정지해 버리는 유화그림과는 달리, 한 획으로 발묵을 결정하는, 그래서 숨김없이 필의 흐름이 드러나는 먹그림은, 필연적으로 순간 속에 들어서고 순간의 연속과 지속을 보여준다. 또한 그래서 이러한 그림의 관람자는 숨구멍 같은 순간들 혹은 의미들 사이에만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확정된 말이 아닌 사이에서 흔들리는 말만이 그의 그림에 가능한 이유이다. 비록 김호득의 그림들이 우리 비평의 말을 멈추게 할지라도, 사후적으로만 겨우 입을 떼게 할지라도, 나는 그의 그림이 반복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지금 이 곳에서 이러한 그림의 공간, 시간을 만나기는 너무나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강수미 / 홍익대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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