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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가을 들녘에 남겨진 것
황금빛 가을 들녘에 남겨진 것
  • 유재천 경상대
  • 승인 2004.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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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_⑧ 짚동가리

▲끌로드 모네, '건초더미' 연작 중, 1981 ©
가을 들녘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던 벼들이 베어지고 그루터기만 남았다. 오늘날엔 콤바인으로 수확하고 터는 작업까지 논바닥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일이 훨씬 수월해졌지만 예전에는 벼 베기가 끝나고 가을걷이를 마치기까지 시기는 수확까지 여러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 농촌에서 가장 바쁜 시절이었다.


일단 낫으로 벼를 베어 묶고 묶은 벼들은 지게로 져서 길까지 옮겨 길가에 세워 말리게 되는데, 예전 가을 들녘에는 햇볕에 말리느라 길가에 세워놓은 볏단들로 가을 길은 긴 황금 터널이 돼 또 하나의 장관을 이루곤 했다.


볏단들은 길이나 논두렁에서 말린 뒤 마당 한켠으로 옮겨 쌓아놓게 되는데 이 쌓아놓은 볏단을 볏가리, 낟가리, 또는 노적가리라고 불렀다. 볏가리 위에는 비나 눈을 피하기 위해 짚단을 삿갓 모양으로 덮어 묶어 두었다가 탈곡기나 그네(홀태), 와룽(탈곡기의 일종, 발로 밟아 통이 돌아갈 때 와룽 와룽 소리를 내서 와룽이라고 불린다)을 이용해서 탈곡을 한 뒤 다시 멍석에 말리거나 창고에 넣어두는데, 창고가 마땅치 않으면 안마당에 통가리를 치고 그 안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방아를 찧어 먹었다.


탈곡을 하고 나면 짚단은 짚단대로 탈곡기에 마모된 검불은 검불대로 쌓아 두었다가 땔감이나 기타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탈곡하고 난 짚단들을 집채만큼 높이 쌓아 놓은 것을 짚동가리(짚가리)라고 하는데 볏가리를 쌓을 때처럼 밑에서 짚단을 던지고 위에서 받아 쌓는 사람들 사이에 손발이 척척 맞아야 쉽게 쌓을 수 있었다. 통가리나 짚동가리 크기는 그 집의 농사 규모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어 꿀장수 할머니나 박물장수 할머니 같은 행상들이 날이 저물어 동네에서 자고 가야 할 경우 짚동가리가 큰 집을 찾아가곤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붕을 해 이는 일이 시작되는데 이때쯤이면 날도 제법 추워져서 양지쪽에서 손을 호호 불면서 이엉을 엮곤 했다. 일정한 길이가 된 이엉들은 둘둘 말아 마당 구석에 세워 놓는다. 이렇게 모인 이엉 뭉치들로 다시 한번 농촌 마당은 가득 차게 된다. 이엉들이 지붕을 이을 정도로 만들어지면 좋은 날을 받아 헌 지붕을 헐어내고 새 지붕을 얹게 된다. 검게 썩은 헌 지붕의 이엉들은 퇴비로 사용되고 새 지붕과 새 담으로 노랗게 단장한 집들로 마을은 갑자기 환해지고 따뜻해진다.


짚단은 지붕을 잇는 일 외에도 부엌의 땔감으로 사용되곤 했지만 겨우내 가마니를 치거나 맷방석, 멍석을 짜고 새끼를 꼬는 일 등 농사꾼들의 일감 재료로 사용됐다. 땔감으로 짚은 신나무나 솔가리, 깻단 등에 비해 화력이 약하지만 농민들의 마음을 닮은 은은한 화력을 가져서 잿불에 고구마를 묻어 구워 먹거나 새차귀(덫)를 놓아 잡은 새를 구워 먹는 데, 또는 호박잎에 만 붕어나 미꾸라지를 구워 먹는 데는 타지도 않고 제격이었다.


짚동가리는 농촌 아이들에게 숨박꼭질할 때 훌륭한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마당 한 구석의 짚동가리가 몸을 숨기기 좋았던 것이다. 때로 짚단 속으로 파고 들어가 쥐이를 옮겨와 부모님들께 야단맞는 일도 많았다.


한때 밀주 단속이 심하던 시절에는 술 조사가 나오면 술독을 짚동가리로 옮겨 숨기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술 조사 나온 사람들은 꼬챙이로 짚단 속을 쿡쿡 찔러 술독을 귀신같이 찾아내 농촌 사람들을 울리곤 했다.


때로는 땅에다 술독을 묻고 그 위에 짚동가리를 쌓아 술을 숙성시키기도 했는데 이런 술을 ‘짚동가리 술’이라고 했다. 일제 때 밀주단속을 피하기 위해서 나온 방법이라고 하는데 짚단의 보온효과로 인해 잘 숙성된 술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일단 땅에 묻게 되면 짚동가리를 다 쓸 때까지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삼동을 지나거나 길게는 6개월 이상 숙성된 고급술이 나오곤 했다. 

유재천 / 경상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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