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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원리' 번역에 대한 몇가지 지적들
'희망의 원리' 번역에 대한 몇가지 지적들
  • 김진 울산대
  • 승인 2004.11.19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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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희망의 원리'(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가 그의 생애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10년 이상을 연구에 몰두하여 저술한 대표작이 바로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이다. 그런데 이 책을 박설호 교수가 다시 10년 이상을 공들여 번역하였다. 1938년에 뉴욕에서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7년 매사추세츠의 캠브리지에서 탈고하였던 이 책의 원제는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이었다. 당시 최고의 신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폴 틸리히의 추천으로 옥스퍼드대학출판부가 출판에 관심을 보였으나 계약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블로흐가 마르크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의 출판을 거절당한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1946년 뉴욕에서 ‘자유와 질서’(‘희망의 원리’ 제36장)가 출판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Arthur Kaufmann 作, 1938년. ©
1954년과 1955년에 ‘희망의 원리’ 제1, 2권이 동베를린의 아우프바우 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독의 국가상을 받았고 독일학술원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국가철학자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 1959년에는 ‘희망의 원리’ 제3권이 간행되었다. 같은 해에 서방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수어캄프 출판사에 의하여 완성본이 출판되기에 이른다.

독서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아서 원서와 일일이 대조해보지는 못했으나, 느낌에 반하는 것들이 몇 가지 발견되어서 지적하고자 한다. 블로흐의 희망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직-아닌-존재”(das Noch-Nicht-Sein)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개념을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287), “아직 존재하지 않은 무엇”(417), “아직 현존하지 않은 것”(488), “어떤 아직 없는 존재”(2566) 등으로 너무나 불규칙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20장(요약)은 블로흐가 ‘튀빙겐철학서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아직-아닌-존재의 존재론”의 토대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그런데 역자는 이곳에서 부정으로서의 ‘아님’(Nicht)과 없음으로서의 ‘무’(Nichts)를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629). 이 장에서만 역자는 Nicht를 ‘없음’, Noch-Nicht를 ‘아직 없음’, Nichts를 ‘없는 것’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무(Nichts)와는 달리 ‘아님’(Nicht)은 구체적인 유토피아론에서 적극적인 의미 기능을 가지고 있다. Nicht는 어떤 특정한 무엇을 구성하는 본질적 계기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지시한다. 이 경우에 ‘없음’이라는 개념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태가 있지 않다는 한정적인 의미로 제한해야 한다. 따라서 ‘아님’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Nicht-Da 역시 “거기 없음”이 아니라 Da(특정한 곳에 무엇이 드러나 있는 상태)의 부정, 즉 어떤 것이 “드러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아직 아닌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641). 그렇다면 “아직 접하지 못한 경험”(Noch-Nicht-Erfahrung)(649) 역시 “아직-아닌-경험”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토피아적 질료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Vor-Schein(430)이다. 역자는 이를 “예측된 상”으로 번역하여 지나치게 주관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인쇄하기 전의 ‘미리 보기’와 같은 것이다. “미리 드러남”(先顯)은 희망 또는 유토피아 내용을 예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며, 거의 모든 창작 및 사유활동에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주관적 정서 및 인지작용에 국한되지 않고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자연 질료의 창조적인 전개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사용된다.

또한 역자는 das Antizipierende(34)를 “미래지향적 시각”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선취하는 것” 혹은 “예견하는 것”으로서 시각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쪽에 나온 관련 문장은 오역임이 분명하다. 또한 역자는 Dunkel des gelebten Augenblicks를 “충만한 삶의 순간이라는 어두움”(600)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그보다는 “살고있는 순간의 어두움”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바깥 영역”(Exterritorialitat zum Tode)(2506)이라는 표현 역시 분명하지 않다. 블로흐가 의도하는 것은 가장 강한 반유토피아로서의 죽음 역시 희망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킬 수가 없는데, 그것은 실존의 원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죽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실존은 죽음에 대하여 불가역적이다. 역자처럼 그것을 “바깥 영역”(2767)이라고 번역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번역본에 원전 페이지를 병기하지 않은데다가 원전의 문단 구분조차 따르지 않아서 원전 대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상의 지적들은 역자의 수고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다음 기회에 보완해주기를 바라마지 않으면서, 다시 한번 역자의 성공적인 번역에 경의를 표한다.

 

※ 참고 ※

[앞에서 오역이라고 지적한 부분]
34쪽: “미래 지향적 시각은 그러한 방식으로 희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희망은 공포심과는 반대 개념으로서의 (물론 공포심도 미래를 바라보려는 시각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정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변적 유형의 사고 방향>으로서 수용된다. 여기서 대립되는 개념은 공포가 아니라 기억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어떤 나쁜 것을 규정하고 있는 좁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나아가 인간의 정서만 고려한 사려 깊지 아니한 회화 작업, 추상적 유형의 유희 형태, 앞으로 향하려는 꿈 내지는 미래 지향성이라는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수정]: “예견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희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희망은 공포와 반대되는 (왜냐하면 공포 역시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서일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지적 유형의 방향설정 행위로서 이해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대적인 것은 공포가 아니라 기억이다). 그렇게 규정된 미래지향성의 표상과 생각은 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토피아라는 말은 사려 깊지 못한 충동적인 그림이나 추상적인 유형의 유희 형식처럼 좁은 의미에서, 그리고 단지 나쁜 것으로 규정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앞을 향하여 나가는 꿈이나 예견 그 자체를 새롭게 대변할 수 있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34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테레케이아’는 완성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또 다른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적 존재이기도 하다.

417쪽 이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 개념에 대한 블로흐의 두 가지 해석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직역하면 “가능성을 향한 존재자”(das Nach-Moglichkeit-Seiende)는 특정한 방향 및 사실에 국한된 가능성 개념을 의미하고, “가능성 안에 있는 존재자”(das In-Moglichkeit-Seiende)는 모든 것에 대하여 열려 있는 가능성 개념을 의미한다.

349쪽: “이상에 대한 끝없는 근접(칸트)”은 “이상에 대한 무한한 접근(칸트)”으로 할 경우에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최상의 선”(das hochste Gut)은 철학계에서 “최고선”으로 통용되고 있다. 2869쪽의 “훌륭한 최고상태”(summum bonum) 역시 최고선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 2864쪽: “가설적으로 요청하는 가능성”(postuliert-postulative Moglichkeit)는 “요청된-요청적 가능성”으로 직역하는 것이 칸트의 취지에 더 가깝다.

2864쪽: “기쁨의 전언”으로 표기하는 대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명료하다.
516쪽: “헤겔 ( )철학 비판에 대한 서언” 중에서는 ( ) 안에는 ‘국가’라는 말이 빠져 있다.

217,218쪽: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기분과 관련된 용어 중에서 Ungestimmtheit는 ‘유쾌하지 않은 느낌’(216)이나 ‘비일치성’(217, 218)이 아니라 권태를 불러오게 하는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블로흐는 ‘불유쾌한 언짢은 기분’(Verstimmung)과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으나 역자는 그 차이를 간과하였다.

225쪽: In-der-Welt-Sein 역시 “세상 속에 스스로 존재함”이 아니라 “세계내존재” 혹은 “세계 안에 있음”이다. 하이데거에서 세계내존재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던져져 있으며, 그런 조건 하에서만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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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호 2004-11-21 11:35:47
김 wrote: 독서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아서 원서와 일일이 대조해보지는 못했으나, 느낌에 반하는 것들이 몇 가지 발견되어서 지적하고자 한다. 블로흐의 희망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직-아닌-존재”(das Noch-Nicht-Sein)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개념을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287), “아직 존재하지 않은 무엇”(417), “아직 현존하지 않은 것”(488), “어떤 아직 없는 존재”(2566) 등으로 너무나 불규칙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박 writes: 좋은 지적이다. 내가 중시한 것은 문장과 문장의 맥락 내지는 문맥이었다. 자구적으로 고찰할 때 어색한 표현도 더러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김 wrote: 제20장(요약)은 블로흐가 ‘튀빙겐철학서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아직-아닌-존재의 존재론”의 토대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그런데 역자는 이곳에서 부정으로서의 ‘아님’(Nicht)과 없음으로서의 ‘무’(Nichts)를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629). 이 장에서만 역자는 Nicht를 ‘없음’, Noch-Nicht를 ‘아직 없음’, Nichts를 ‘없는 것’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무(Nichts)와는 달리 ‘아님’(Nicht)은 구체적인 유토피아론에서 적극적인 의미 기능을 가지고 있다. Nicht는 어떤 특정한 무엇을 구성하는 본질적 계기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지시한다. 이 경우에 ‘없음’이라는 개념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태가 있지 않다는 한정적인 의미로 제한해야 한다. 따라서 ‘아님’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Nicht-Da 역시 “거기 없음”이 아니라 Da(특정한 곳에 무엇이 드러나 있는 상태)의 부정, 즉 어떤 것이 “드러나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아직 아닌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641). 그렇다면 “아직 접하지 못한 경험”(Noch-Nicht-Erfahrung)(649) 역시 “아직-아닌-경험”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박 writes: 좋은 지적이다. 그런데 용어의 뉘앙스가 약간 다를 뿐이다. 옳고 그르고를 말할 수 없다.

김 wrote: 유토피아적 질료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Vor-Schein(430)이다. 역자는 이를 “예측된 상”으로 번역하여 지나치게 주관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인쇄하기 전의 ‘미리 보기’와 같은 것이다. “미리 드러남”(先顕)은 희망 또는 유토피아 내용을 예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며, 거의 모든 창작 및 사유 활동에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주관적 정서 및 인지작용에 국한되지 않고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자연 질료의 창조적인 전개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사용된다.

박: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말씀이다. “예측된 상”이라는 표현 자체에 하자가 있을 수 있으며, 선현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 스스로 역자 주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블로흐의 “Vorschein”은 “Schein”에 비해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으로 단순히 앞서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발터 벤야민이 “지금 시간 (Jetztzeit)”을 사용하여, 미래의 혁명적 시간이 응집된 폭발적 시간 개념으로 “지금 시간 (Jetztzeit)” 개념을 사용하고 있듯이- 현재와 미래가 변증법적으로 서로 엉켜 있는 시간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Vorschein”의 개념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규명될 뿐 아니라, 미적 예술적 차원에서도 사용되는 개념이다. 미래의 더 나은 존재론적 예술적 상 미리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자는 이를 “예측된 상”이라고 명명해 보았다.

김 wrote: 또한 역자는 das Antizipierende(34)를 “미래지향적 시각”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선취하는 것” 혹은 “예견하는 것”으로서 시각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쪽에 나온 관련 문장은 오역임이 분명하다. 또한 역자는 Dunkel des gelebten Augenblicks를 “충만한 삶의 순간이라는 어두움”(600)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그보다는 “살고 있는 순간의 어두움”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박 writes: 나 역시 “das Antizipierende”가 “선취 Vorwegnahme” 내지는 “선 파악 Vorgriff”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번역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다. 미래의 더 나은 사실을 미리 파악하려는 태도 자체가 미래 지향적인 게 아닌가? 이는 “오역”이라기 보다는 어감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선취라고 번역하면, 독자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번역자는 번역 상에서 원문을 고려할 것인지, 독자를 고려할 것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자는 자구적 의미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번역하였다. “충만한 삶의 순간의 어두움”의 개념은 블로흐의 전문 용어이기 때문에 그 정확성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거론해준 김진 교수에게 우선 감사드린다. "der gelebte Augenblick"은 김진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살고 있는 순간”이라고 번역될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어학적으로도 잘못된 번역이다. “구성되지 못한 질문 (Die unkonstruierbare Frage)”이라든가 “충만된 삶의 순간의 어둠 (Dunkel des gelebten Augenblicks)”은 블로흐의 존재론에서 중요한 용어가 아닌가? “충만된 삶의 순간”은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계기에 의해서 무언가를 깨닫는다. 이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며 자기 자신과 만나는 순간을 가리킨다. 회화, 문학, 음악 등의 예술 작품을 때하는 인간의 "자기와의 만남 (Selbstbegegnung)"이다.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정신』에서 자기 만남의 진행 과정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술 감상자는 그림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갑자기 그림 속에 있었고, 바로 이 모습이 순식간에 그려졌습니다." “충만된 삶의 순간”은 살아가면서 드물게 경험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경우를 “살고 있는 순간”으로 번역하면, 원래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역자는 생각한다.

김 wrote: “죽음으로 향하는 바깥 영역 (Exterritorialitat zum Tode)”(2506)이라는 표현 역시 분명하지 않다. 블로흐가 의도하는 것은 가장 강한 반 유토피아로서의 죽음 역시 희망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킬 수가 없는데, 그것은 실존의 원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죽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실존은 죽음에 대하여 불가역적이다. 역자처럼 그것을 “바깥 영역”(2767)이라고 번역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박 writes: 김진 교수의 설명은 그 자체 타당하다. 나의 기억으로는 이 단어의 번역에 오랜 시간을 소비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면 “Exterritorialität”이라는 단어는 블로흐가 만들어낸 조어이다. 이 단어의 개별적인 뜻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바깥 영역의 특성”이다. 따라서 “Exterritorialität zum Tode”라는 표현은 “죽음으로 향하는 바깥 영역”보다는 “죽음이라는 바깥 영역의 특성”으로 번역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김 wrote: 번역본에 원전 페이지를 병기하지 않은데다가 원전의 문단 구분조차 따르지 않아서 원전 대조가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상의 지적들은 역자의 수고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다음 기회에 보완해주기를 바라마지 않으면서, 다시 한번 역자의 성공적인 번역에 경의를 표한다.

박 writes: 역자는 저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맥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역자가 행간을 끊을 수 있는 작은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블로흐는 문단을 길게 잡고 글을 썼다. 한 문단이 3페이지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행간을 끊는 게 독자의 주의력에 도움을 준다고 역자는 믿는다. 원문을 대조해 보면 아시겠지만, 역자는 문맥만 끊은 게 아니라, 복잡한 문장들을 끊어서 번역했다. 자구적 번역 그리고 원문에 대한 직역은 독자가 이해하는 데 방해로 작용한다.

김 wrote: 34쪽: “미래 지향적 시각은 그러한 방식으로 희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희망은 공포심과는 반대 개념으로서의 (물론 공포심도 미래를 바라보려는 시각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정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변적 유형의 사고 방향>으로서 수용된다. 여기서 대립되는 개념은 공포가 아니라 기억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어떤 나쁜 것을 규정하고 있는 좁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나아가 인간의 정서만 고려한 사려 깊지 아니한 회화 작업, 추상적 유형의 유희 형태, 앞으로 향하려는 꿈 내지는 미래 지향성이라는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수정]: “예견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희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희망은 공포와 반대되는 (왜냐하면 공포 역시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서일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지적 유형의 방향설정 행위로서 이해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대적인 것은 공포가 아니라 기억이다). 그렇게 규정된 미래지향성의 표상과 생각은 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토피아라는 말은 사려 깊지 못한 충동적인 그림이나 추상적인 유형의 유희 형식처럼 좁은 의미에서, 그리고 단지 나쁜 것으로 규정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앞을 향하여 나가는 꿈이나 예견 그 자체를 새롭게 대변할 수 있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박 writes: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후학들이 번역의 진위를 가려주리라고 생각한다.

김 wrote: 34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테레케이아’는 완성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또 다른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적 존재이기도 하다.

박 writes: 김진 교수의 말은 그 자체 타당하다. 이는 블로흐가 제 18장 “가능성이라는 카테고리의 계층들”에서 자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김 wrote: 417쪽 이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 개념에 대한 블로흐의 두 가지 해석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직역하면 “가능성을 향한 존재자”(das Nach-Moglichkeit- Seiende)는 특정한 방향 및 사실에 국한된 가능성 개념을 의미하고, “가능성 안에 있는 존재자”(das In-Moglichkeit-Seiende)는 모든 것에 대하여 열려 있는 가능성 개념을 의미한다.

박 writes: “가능성을 향해 실존하는 무엇”은 표기상의 오류에 해당한다. “가능성을 향해 현존하는 무엇”이라고 번역해야 타당하다. "das Seiende"이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견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무엇”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존재자”라는 용어는 그 자체 불분명하다. 이는 블로흐의 견해에 의하면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현존하는 무엇”이다. 따라서 역자는 “das Nach-Möglichkeit Seiende”를 “가능성을 향해 현존하는 무엇”으로 번역했고, “das In-Möglichkeit-Seiende”를 “가능성 속에 현존하는 무엇”으로 번역했다.

김 wrote: 349쪽: “이상에 대한 끝없는 근접(칸트)”은 “이상에 대한 무한한 접근(칸트)”으로 할 경우에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최상의 선”(das hochste Gut)은 철학계에서 “최고선”으로 통용되고 있다. 2869쪽의 “훌륭한 최고상태”(summum bonum) 역시 최고선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 2864쪽: “가설적으로 요청하는 가능성”(postuliert-postulative Moglichkeit)는 “요청된-요청적 가능성”으로 직역하는 것이 칸트의 취지에 더 가깝다.

박 writes: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작은 차이라고 생각한다. “최상의 선” 그리고 “최고선”은 동의어이다.

김 wrote: 2864쪽: “기쁨의 전언”으로 표기하는 대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명료하다. 516쪽: “헤겔 ( )철학 비판에 대한 서언” 중에서는 ( ) 안에는 ‘국가’라는 말이 빠져 있다.

박 writes: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블로흐는 복음 (Evangelium)의 단어가 명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이를 “기쁨의 전언 (Frohbotschaft)”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국가”라는 단어가 왜 빠졌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 wrote: 217,218쪽: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기분과 관련된 용어 중에서 Ungestimmtheit는 ‘유쾌하지 않은 느낌’(216)이나 ‘비일치성’(217, 218)이 아니라 권태를 불러오게 하는 ‘아무런 기분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블로흐는 ‘불유쾌한 언짢은 기분’(Verstimmung)과 혼동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으나 역자는 그 차이를 간과하였다.

박 writes: 번역 문장을 곰곰이 읽으면, 독자는 블로흐의 언어유희, 즉 (이중적 의미를 지닌) 용어의 혼용 등이 세밀하게 고려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25쪽: In-der-Welt-Sein 역시 “세상 속에 스스로 존재함”이 아니라 “세계 내 존재” 혹은 “세계 안에 있음”이다. 하이데거에서 세계내존재는 일반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던져져 있으며, 그런 조건 하에서만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박 writes: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잘못된 용어 번역은 수정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직역하지 않고 나름대로 의역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어감 상의 차이에 관해서는 굳이 수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번역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과 문맥의 정확한 전달이라고 생각한다. 블로흐의 문장은 정작 독일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비롭고 난해하다. 나중에라도 지면이 할애되면 번역의 문제점에 관한 글을 따로 발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