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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知識人 실종의 원인을 찾아서
진단_知識人 실종의 원인을 찾아서
  • 최철규 기자
  • 승인 2004.11.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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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없다"…언론의 이념지형에 매몰

IMF 경제위기는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을 야위게 만들었다. 허리를 다친 한국은 오랜 재활의 시간을 가졌다. 불안정한 세계정세와 국내의 심각해진 각종 분열현상은 지식인의 실종을 낳고 있다. 정치권의 이권다툼과 이에 대항하는 대중들의 마구잡이식 싸움 사이에서 지식인들은 갈곳 몰라 방황하고 있다. 사회의 방향을 제시하고 이끄는 선도적 역할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 채 편향된 언론권력의 하위 파트너로 이용되고 있다는 쓰디쓴 진단이 넘쳐나고 있다. 지식을 가득 채워넣어 무거워진 머리로, 오늘날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로 더욱 가라앉는다.<편집자 주>

 

대통령 탄핵 사건 이후로 국가보안법, 언론개혁법, 이라크 파병 등의 정책적 현안이나 대미인식 조정 등의 굵직한 사회적 이슈들이 끊임없이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들은 언론과 정치권에 투영되면서 좌우 또는 보수와 개혁이라는 이분법적 이념 지형으로 틀지어져 갈등과 분쟁으로 확산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이슈의 방향을 설정하고 생산적 합의를 위한 기본 토대를 제공할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이 부진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토대에 부응하는 정체성 모색해야

지식인들은 지금 무력하다. 학문적 엄격함을 바탕으로 세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구현하기는커녕, 정치권력이나 언론 권력의 하위 파트너로 복무하는 소모적 ‘지식 장사꾼’이 있을 뿐이라는 냉소적 시각에 묻혀있다. 한림대 유팔무 교수(사회학)는 “보수와 개혁으로 나뉘어 경쟁만 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지식인들조차 일종의 정파적 집단으로 각인돼 국민들의 신뢰가 상실됐다”라고 말한다.

조병한 서강대 교수(사학)는 “언론의 구미 맞추기식 지식인 활용도 문제지만, 오히려 언론을 이용해 명망가식 사회 활동을 전개하는 지식인들의 무반성적 참여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정체성 모색이 부재한 상태에서 봉사형·출세형 활동으로 과연 내실이 있는가라는 안팎의 비난이 쏟아진다.

만하임의 자유부동하는 지식인론으로부터 바우만의 탈근대적 지식인론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상은 사회의 토대 변화에 부응하며 새롭게 제시돼 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리오타르와 레지 드브레의 지식인 '종말론'을 너무 핑계삼는 감이 없지 않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속화된 사회적 분화와 정보 기술의 급격한 증가로 대중들의 정치사회적 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사회를 선도하기보다 시민과 함께 나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지식인상과 맞물려 있다.

예컨대, 심지연 경남대 교수(정치학)는 “지식인들은 판단 주체인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만 제공하는 보충적 역할만 수행하고 본연의 업무인 학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박영호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엄격한 아카데미즘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부화뇌동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본업인 연구에 충실하면 되고, 지식인은 원래 적극적인 여론 형성의 주체가 아니라는 박 교수의 '원론적' 진단은 현실을 설득하기에는 미진한 감이 있다.

요즘 뜻있는 학자들은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늘날 지식인의 실존이 존재하는 곳은 책과 논문과 특히 '거리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논문'이나 '매체'가 아니라 '확성기'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소리집단'으로서의 지식인 그룹이 부족하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한다. 이것의 돌파는 편향적인 여론을 만들고 그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그럼으로써 "중립적 발언을 정파적 발언으로 만드는" 언론과의 관계설정을 새롭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지식인들만의 '대안매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언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지식인을 대학 안에 묶어두는 요인들은 너무나 많다. 그것은 바로 논문이고 강의이고 기타 잡무들이다. 그러나 그 논문과 강의가 과연 시대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대학의 학문 생산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로 이뤄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현재 분과학문체계로 귀착된 근대 대학체제는 주로 학문의 전문성 담론의 근간이 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전개된 사회과학에 대한 학문의 전문성 담론은 지식인의 비판자적 역할보다는 국가와 시장의 필요에 부응하는 지식생산자로서의 기능성을 강화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다. "대학은 많지만 지성인은 없다"라는 미국의 상황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게 만들고, 석학들이 적극적으로 연대체를 구성하는 유럽의 상황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게 한다.

학문적인 식민성이 이 시점에서 또다시 도마에 오른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왜곡하는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 정진상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수입된 이론 틀로 한국 현실을 재단하려는 ‘거꾸로 된 학문’이 만연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학문의 현실 적합성이 상실되니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결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인 사회 내부 갈등 구조부터 풀어야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모색에 대해서는 다양한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 조병한 교수는 “정치와 시장 그리고 언론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인 특유의 전문적 단체를 구성해 타 분야와 구분되는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전개해 나가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학문에 대한 전문성을 강화하여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위상을 재고하자는 의도다.

반면에 정진상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원리에 따라 지식이라는 상품의 유통망을 쥐고 있는 언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보다 더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정 교수는 소수의 다양한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분출될 수 있는 대안 언론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조치는 사회의 다원적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는 기본 통로를 만드는 지극히 자유주의적인 기본 조치이기 때문에 이념 갈등으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지식인들 스스로가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로 나뉜 이념적 틀로부터 탈피해서 사회적 이슈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회의 일상적 모습 자체가 이념적·정치적 규정을 훨씬 앞지르거나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화 경북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지식인 사회 내부에도 번져 있는 이념적 편가르기가 내부의 생산적 의사소통을 어렵게 하고 역할의 좌표 설정 자체를 방해하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일상으로부터 소외돼 추상화되고 거대화된 이념 논쟁의 사이에서 천편일률적인 목소리와 비현실적인 실천방안들을 제시하기 보다는, 학문적 성찰을 바탕으로 대중과 눈을 맞추고 세분화된 일상의 이슈들에 대해 통합적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상의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전문가 의견

총체적 시각에서 이슈의 복잡성 분석해야

학문의 세계는 사회구조 속에서 토대의 영향과 분리될 수 없는 상부구조에 해당한다.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가치관의 혼란 현상이 심각하다. 물리적 통제가 아니라 문화에 각인된 이데올로기의 확산으로 이슈의 복잡성이 가중되고 있다. 지식인은 이러한 복잡성을 총체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설명하여 사회에 전파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주경복 / 건국대·프랑스어학

앎을 펼쳐낼 구조적 장치 필요

지식인의 사회적 활동은 비록 산발적 형식일지라도 꾸준히 전개돼 왔다. 문제는 사회의 왜곡된 의사소통구조가 견고히 자리 잡고 있어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담론 공간이 정치영역으로 편중돼 있어서 건전한 여론 형성의 매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앎은 곧 행하는 것이다’. 현재는 앎을 풀어낼 수 있는 구조적 장치가 미약해 지식인의 자기 좌절을 야기하고 있다.                                             김영화 / 경북대·사회복지학

 

안정화 사회로 가는 진통단계

한국 사회의 대립과 분열 등의 혼란스러운 양상은 ‘안정화 사회’로 가는 진통단계라 할 수 있다. 지식인 사회가 합리적인 토론과 합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사회 구현에 앞장서야겠지만, 자체적으로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분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다. 지식인 사회 또한 사회 현실과 맞물려가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치가 안정화되면 지식인 사회도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유팔무 / 한림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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