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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일 잣대로 독해...협소한 '실증'에 매몰
친일/반일 잣대로 독해...협소한 '실증'에 매몰
  • 김예림 연세대
  • 승인 2004.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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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 홍기돈 씨의 서평(교수신문 제329호)를 읽고

편집자주 : 교수신문 제329호에 실린 홍기돈 씨의 서평 '親日의 내적논리 주목해야...지나친 동일화는 금물'에 대해 저자인 김예림 씨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 반론에 대한 서평자 홍기돈 씨의 재반박문을 함께 받아 싣는다. 김예림 씨는 역사를 보는 새롭고 포괄적인 '눈'을 강조하고, 홍기돈 씨는 정확한 '콘텍스트' 속에서 그런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두 입장은 명확한 논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 시점 국문학계 내부에 형성된 식민지시기 문학연구가 앞으로 어떤 논의를 이뤄내야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나의 연구서를 검토해준 홍기돈 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30년대 후반 근대인식의 틀과 미의식'에서 나는 피식민 집단이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사상적, 문화적, 미학적으로 식민주의를 내면화하게 되는 과정을 해명하고자 했다. 일본과 서구의 두텁게 축적된 파시즘 연구가 제시해 주듯이 파시즘의 작동과 변위는 다층적이다. 미학적, 철학적, 문화적 이념으로서의 파시즘에 관한 다각적인 이론적 탐색들은 식민지 근대 한국문학, 문화, 사상의 지평을 연계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이 책의 기본적인 질문과 관점을 구성하고 있다. 더불어 책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싶었던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이는 현재 넓게 통용되는 '친일'이라는 용어와 관련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식민지 체험의 뿌리깊은 흔적과 내상의 구조라고 말하겠다. 나의 목적은 애초부터 일제 말기의 역사적, 사상적 지평을 검토하고 인식론적, 미학적 지형도를 그리는 데 있었지 특정 작가나 작품이 '친일'인가 아닌가를 흑백가리듯 따지는 데 있지 않았다. 연구서를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관련해 홍기돈 씨의 비판을 다시 읽어본다.

우선, 씨는 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적인 대상을 매개 없이 분리·확대시키는 방식으로 나의 문제의식을 축소·굴절시키고 있다. 내가 기대한 것은 자의적 분리와 부분의 확대에 기반한 비판이 아닌 보다 포괄적이고 입체적인 독법에 기반한 비판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룬 일제 말기의 역사철학적 상상력의 판도, 조선의 자기-정체화 구도, 트랜스내셔널리즘, 동양이라는 문화공동체 이념 등등에 대해서 종합적인 도움을 제공해준다면 감사하겠다.

씨는 나의 연구를 '친일/반일'의 잣대로 독해, 분해, 평가하고 있다. 관점의 차이로 인해 씨의 해석은 그야말로 상호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다. 그래서 내가 문제적 징후로 포착하고 있는 모든 지점이 씨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올바른' 지점으로까지 옹호되고 있다. 나의 연구 목표는 이렇게 부주의하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읽히고 상찬돼 온 역사적, 미학적, 이념적 징후들을 다시 포착하고, 기존의 표층적이고 단편적이며 축어적인 해석을 비판하는 데 있다. 친일이라는 용어의 사용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친일이라는 개념은 식민화 과정의 연속적이고 심층적인 구조를 가려버리고 이를 특정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책임' 문제로 비맥락화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틀은, 평자도 썼듯이, '청산'이라는 기계주의적 발상이나 집단적 자기 해소 방식으로 접합된다. 내 입장이 이러하므로, '친일'이라는 개념으로 이 책이 투박하게 재단되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단순논리로 무장한 소위 '친일 감별사'가 아니며 '파시스트 감별사'도 아니다. 나의 작업은 제국의 전면적이고 억압적인 영향 속에서 조선이라는 피식민 주체에게 던져졌던 동조, 협력, 소외, 배제 등의 복잡한 가능성의 지층들을 파들어감으로써 올바른 역사적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지난한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쓰여졌으며 특히 균열적이고 자기모순적인 피식민 주체의 착종된 내면과 자기 환상을 직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위와 같은 총괄적인 질문과 고민 속에서 진행된 나의 연구에 대해 씨는 이태준과 김동리를 거론하면서 "당연한 것"을 왜 "왜곡"하고 있는지를 따지고 있다. 작가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씨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뤄진 국내외의 의미있는 연구들을 '파벌'로서가 아니라 심화되는 학적 관심으로서 면밀하고 폭넓게 체험했으면 하는 점이다. 그리고 개별 작가의 '부역'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시대적, 사상적 판도 안에서 문학 외적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재배치하는 입체적인 시선을 발휘했으면 하는 점이다. 씨는 1부 4장을 중심으로 내가 "실증적 부분"을 소홀히 했음을 비판하지만, 씨의 일차원적인 '사실'에의 집착이야말로 "문제가 많다". 씨는 원고가 검열에 걸려 전면 삭제당했다거나 친일어용문학단체 가입원서를 "아궁이에 처넣어 버"렸다거나 하는 이런 저런 사례를 들어 작가들이 '친일'을 한 게 아님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A이므로 B이다' 식의, 오랜만에 접하는 튼실한 단순인과론이 놀라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사실'이라는 협소한 정황 증거에 매몰된 결과 대상이 지닌 복잡성을 다 몰수해버리면서 '실증'의 의미와 영역을 터무니없이 실추시킨다. 정치적 무의식이란 개념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정치적 무의식은 단편적인 정황증거들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는 규명될 수 없다. 정황 증거의 허망한 자명성을 배반하고 나오는 인식이 광의의 '실증'의 대상으로 포괄돼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식민 역사의 내면의 구조를 파악하는 작업은 낱낱의 '사실'들을 유아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달성되는 게 절대 아니다. 나는 한국의 식민지 체험의 내면을 '끊임없이 표층을 배반하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자 했고 이 어긋남의 구조를 규명하고자 했다.

씨는 "대동아공영론"과 개별 작가를 매개없이 대응시켜 자꾸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상정하는 대동아공영론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내가 논의하는 것은 정치논리로서의 대동아공영론이 아니라 사상, 문화로서 확장, 변용된 그것임을 밝혀둔다. 또 내가 "김동리를 자꾸 순수의 틀로 몰아간다"라고 했는데, 나는 김동리를 "순수"로 몰지 않았으며 반대로 그의 미의식의 정치성을 문제삼았다. 그리고 씨는 1930년대 후반에 쓰인 '조선'이라는 어사를 축어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나는 '조선'이라는 이념어가 당시 '일본'과 대립각을 갖는 것이 아니었음을 규명했다. 이것은 조선이나 조선문화가 제국에 속하는 에스닉(ethnic)한 것으로 재설정됐던 상황과 연관된다. 이런 맥락에서 김동리만이 아니라 당시 지식계에서 일어난 '신라', '무속' 등 '조선적인 것'의 호출을 '저항'의 지표로 보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단순하다. 일제 말기의 조선 민속에 대한 문화정책과 동화정책, 조선의 지방화에 대해서는 국문학계뿐만 아니라 사학계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 많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외에 그는 김동리와 '범부'의 관계를 들어 김동리가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상적 근거"의 하나로 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미 비판적 해석이 나온 바 있다. 이태준에 대해서 씨는 "대동아공영권이 발흥할 즈음" 그가 "생활의 부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했는데 "생활"에 눈돌린 게 '저항'의 지표가 된다는 식의 논의가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지 모르겠다. 근거가 부족한 비약이다. 이하 개별적인 텍스트 해석과 평가가 보이는 차이는, 그 심층의 근거를 앞에서 밝혔으므로 더 거론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씨가 나의 연구를 최근의 이론적 "유행"의 한복판에 있다는 식으로 위치지은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관점을 달리하는 연구 경향, 다른 연구자들의 이론적 작업을 한때의 경박한 '붐' 정도의 공허한 어떤 것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행위는 현재 학계에 일반화돼 있는 교활한 악습이다. 나는 공동 연구와 생산적 비판을 통해 연대하고 소통하는 연구집단을 형성하는 일이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학풍이나 연구 써클은 대부분 "유행"이라는 딱지를 붙여 '몰아세우고' 싶을 때나 '인정'되는 듯하다. 씨의 서평과 같이 실린 '국문학계 친일문학 논쟁'을 읽으면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특정 연구집단의 호출이나 개별 연구자들의 호출이 중심/주변의 논리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홍기돈 씨 같은 젊은 연구자가, 공격을 위해서건 옹호를 위해서건 간에, 자신과 동일한 위치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을 마치 다른 '상부' 혹은 '중심'을 '대리'하는 존재로 재단해버린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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