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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거울 자체가 없지 않은가
우리에겐 거울 자체가 없지 않은가
  • 김상봉 서양철학
  • 승인 2004.09.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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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論_장은주 교수의 서평에 답한다

김상봉/문예아카데미 서양철학

남의 책을 평하는 것은 고역이다. 가치 없는 책의 경우엔 더하다. ‘나르시스의 꿈’은 몇 해 전 연습 삼아 쓴 글들을 묶은 책으로서, 생각건대 특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아니다. 그 점에서 장은주 교수께 고맙고 미안하다.

물론 그 책에 실린 글들을 꿰뚫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이 있기는 했다. 그것은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이라는 그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한편에서는 서양철학사를 외부에서 규정하고 극복하려는 욕구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다 명확히 하려는 욕구였다. 하지만 그 책에 묶인 글들은 그런 욕구에 훨씬 못 미치는 것들이었다. 나 자신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이라는 부제는 내 나름의 겸손의 표시였다.

그렇게 연습 삼아 씌어진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저자의 입장에서 과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도한 관심의 이면에는 장은주 교수가 지적했듯이 거꾸로 우리의 나르시시즘이 작용했으리라는 데 대해 나 역시 동의한다. 유감스럽게도 서양정신의 나르시시즘을 비판한 이 책이 정작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기생하고 그것을 부추긴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개념을 정확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나르시시즘이란 말을 오직 서양정신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다시 말해 나는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의 자기애나 아집 또는 자기연민을 나르시시즘이라 부른 것도 아니고, 프로이트가 전문적으로 규정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서 나르시시즘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나는 오비디우스가 전해준 나르시스의 신화를 나르시시즘의 원형적 텍스트로 삼고 서양 철학사를 그 전개과정으로 삼아 서양정신사의 본질적 충동을 규정하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그것은 한 번도 타자적 정신으로 인해 자기와 단절되고 자기 자신을 상실한 적이 없었던 자유로운 정신의 자기인식의 고유성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과 내가 서양정신사의 본질을 나르시시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름으로는 같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엄격히 구별해야 할 두 가지 다른 사태이다.

그런데 장은주 교수는 이 둘을 애써 구별하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그의 판단에 따르면, 정작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것은 서양철학이라기보다는 서양철학이 나르시스적이라는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열광하는 독자들이다. 게다가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자뿐 아니라 저자인 “김상봉이 말하는 그 ‘우리’의 슬픔 역시 뒤집힌 나르시시즘”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결국 서양정신의 나르시시즘은 사라지고, 저자와 독자의 나르시시즘만 남았다.

그러나 설령 이 책의 주장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런 주장을 낳은 문제 상황은 남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정신사적으로 치유할 수 없는 단절을 겪은 우리에게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서양철학자들은 라캉에게서 보듯 주체를 말할 때면 아직도 거울에 대해 말한다. 거울은 그들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불변의 은유이다. 그것이 왜곡이든 진실이든 그들의 주체성은 거울에 있다. 그러나 시인 이상은 이미 오래 전에 ‘거울’이란 그 유명한 시에서 우리가 거울을 잃어버린 족속임을 일깨워줬다. 나르시스가 되고 싶어도 우리에겐 거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울 없이 어떻게 우리는 자기에게 돌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은 내가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에서 칸트적 주체개념을 비판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거울 없는 주체성, 단절과 분열 속에 처한 정신의 주체성을 이론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었다.

장은주 교수는 내가 비판한 나르시시즘은 나에게 뒤집어씌운 대신, 내가 오랫동안 다듬어온 서로주체성은 마치 주인 없는 습득물인양 마음씨 좋게 헤겔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공정하지 않은 처사일 뿐 아니라, 헤겔을 위해서도 쓸모없는 적선이다. 무덤에 있는 헤겔은 서로주체성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는 언제나 거울 앞에서 철학했던 사람이다. 그에겐 반성이 존재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헤겔이 내가 우리이고 우리가 나라고 말하고, 자기는 오직 지양된 것으로서만 현실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말하는 나와 우리의 공속성이나 주체의 자기소외나 자기지양이 거울을 잃어버린 우리의 자기인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무덤 속에서 헤겔이 우리의 게으름과 견강부회를 나무랄 것이다. 누구보다도 역사적으로 사유했던 헤겔에겐 그가 사유했던 고유한 역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우리가 해석해야 할 역사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역사의 단절과 그 단절 위에서 모색해야 할 새로운 주체성에 대해 사유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유를 위한 연습이었다. 장은주 교수의 비평을 읽으면 이 책은 아직도 진정한 독자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독자 없이 저 혼자 연습 삼아 씌어진 책이 자꾸 신문의 비평란에 오르내리는 모양이 아무래도 아도르노가 말한 문화산업의 농간 때문인 것 같아 저자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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