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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한국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
진단_한국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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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생태주의에 대해 학계 비판...정치적 민주주의와 결합해야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지역학)
“생태의식이 대중화되고 개인화되면서 상품화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태담론도 예전의 운동성과 집중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파편화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생태담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한면희 서강대 교수(환경철학)
“한국의 생태운동은 이제 겨우 2단계를 지났다. 여기에서 녹색평론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4단계로 도약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역을 고집하기보다는 서로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한국의 생태운동은 민주주의라는 대전제 아래 다시 재집결해야 한다. 정치적인 민주주의의 일정 수준의 성취 없이는 어떤 생태적 운동도 그 지속성을 갖지 못한채 일회성 사건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국내 생태담론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적 토론의 풍경은 없고 집단시위나 정책회의만 있다. 한쪽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진국 따라잡기 위한 이론공부만 이어진다.

한면희 서강대 교수(생태철학)는 신간 ‘초록문명론’(동녘)에 국내 생태론자들의 글을 단 한편도 인용하지 않았다. 좀 의아해서 물어보니 “인용할 게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국내 생태론들이 대부분 에세이고 논문들도 외국 글을 짜깁기한 게 많아 곤란했다는 것. 그는 대표적 생태이론가로 알려진 구승회 동국대 교수(생태윤리)의 ‘환경윤리와 생태철학’(동국대출판부 刊)이 “톰 레간의 책 한 章을 그대로 옮겨와 실은 표절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나마 김지하, 장회익 등이 비체계적이긴 하지만 이론적 영감을 풍부히 함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회익 교수의 ‘삶과 온생명’(솔 刊)도 “그 실천성이 매우 취약한 저서인데 과대포장됐다”라고 비판했다. 문제는 이런 비판을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생태학계가 너무 좁아 이견이 있더라도 그냥 속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교수의 이 말이 국내문헌 미인용의 전체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달리 생각해보면 수준을 너무 서양 선진국에 맞추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이론 vs 이론, 에세이 vs 에세이라는 도식도 생태이론이 열려있고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계간 ‘환경과생명’ 편집주간인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지역학)는 이런 학계의 이론적 현실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문순홍, 구승회, 한면희 등이 그래도 전공 이론가에 속하며, 한 단계 아래에서 혹은 다른 층위에서 최병두 대구대 교수(지리학),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과 자신의 작업이 이뤄진다고 말한다. 한국 생태이론의 기대주였던 문순홍 박사는 최근 2년간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중단중이다.

아무튼 수준 있는 생태담론을 펼칠 이들이 이 정도라는 학계의 판단은 꽤 놀랍다. 그 많은 환경관련 학과, 단체들이 있건만, ‘생태담론’은 그동안 담론을 위한 ‘사랑방’조차 꾸미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장은 "제대로 된 생태론자 한 명, 아니 생태론에 관심을 갖는 후속세대 하나 길러내지 못하는 한국의 대학제도는 지식인 양성기관으로서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생태이론이 그렇게 매력이 없는 것일까.

“학술대회에서 제대로 토론해본 적이 없다”는 한면희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이는 담론공간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생태담론이 펼쳐지는 공간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 두 잡지와 환경단체의 소식지 몇몇이 전부다. 놀라운 것은 이 마저도 필자 기근에 허덕인다는 것. 조명래 교수는 “젊은 학자들을 편집위원 등으로 많이 영입해오지만, 자기영역을 벗어나면 글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라며 요즘 젊은 학자들의 좁은 시야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논쟁다운 논쟁 한번 없는 생태담론의 밋밋한 현주소는 생태주의자들의 고유한 특성에서 비롯하는 면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이다. 그는 “국내 생태이론가들의 현실인식은 타이타닉 위에서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는 꼴”이라고 비판한다. 서구 선진국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풍요’가 지구의 ‘생태적 순환’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이는 모든 환경운동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녹색의 역사인식은 정당한가

이런 절대적 근본주의는 김종철 교수 나름의 종합학문적 성찰과 현실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지만, 점점 더 ‘감정’이 섞여 들어간다는 비판이 생겨난다. 김종철 교수는 국내 이론가들에게 “식민주의에 안주하거나,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 말은 ‘녹색평론’에도 해당된다. 최근 스콧 니어링,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 등 ‘녹색평론’이 배출한 스타사상가들이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서구중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박홍규 교수는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가 묘사한 티베트는 정치사회를 제외한 티베트의 극히 일부분만 보여주고 있으며, 다수 티베트 민중의 억압받는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는 “스콧 니어링이 청교도들의 미 대륙 침범과 인디언 학살을 삶의 개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최근 지적한 바 있다.한마디로 요즘 ‘녹색평론’은 생태와 생태 아닌 것, 농촌과 농촌 아닌 것이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역사와 사회, 정치를 보고 있다. 녹색평론사에서 최근 펴낸 ‘쌀과 민주주의’(천규석 지음)라는 책은 쌀개방으로 위기에 처한 ‘쌀산업과 문화’를 살리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성취한 그리고 추진하고 있는 모든 의미있는 제도와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논리 자체가 매우 중앙집권적이며 ‘쌀’의 중요성을 역사에서 찾는 모습은 ‘쌀의 신격화’에 이를 정도다.

최근 ‘녹색평론’은 자신들이 국내에 소개해온 저명한 생태주의 필자들을 초청해 순회강연을 하며 저변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는 녹색평론의 주요 활동인 한살림 운동이 농업생산의 생태화, 농촌구조와 소비문화의 혁신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시지식인들의 ‘영성-웰빙’ 차원에서 질좋은 농산물을 공급하는 것으로 머물자 그것을 타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홍규 교수는 “몇마디 되지도 않는 내용의 강연으로 대중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생태-포퓰리즘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식의 일방적 전진은 인접집단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결국 이론가, 실천가, 운동가, 에세이스트 등이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내는, 그러면서도 전부 합쳐보면 별 큰 차이 없는 동어반복으로 귀결되는 생태주의의 파편화와 매너리즘의 악화를 낳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는 요즘 들어 두드러지는 생태주의의 ‘개인화’와 ‘상품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웰빙’이라는 말은 그것의 가장 극명한 표현이다. 오늘날은 누구나 생태적인 것과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생태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생태적 삶을 위한 실천으로 쉽사리 옮겨지기 힘들다. 생태라는 것은 공동체적인 배려가 있어야 성취될 수 있는 삶의 시스템인데 비해, 생태의 개인화는 자신의 생활권에 속한 부분만 생태적으로 관리하는 '이기적' 차원에 머물 뿐이다. 또한 생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이것에 반하는 삶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생태대중화라는 말은 사실 그 한계가 무척 큰 트렌드다. 따라서 생태담론의 활성화는 최소한 생태적 삶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도덕적 자극과 지적 호기심, 함께사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정열적으로 불러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생태주의의 근본주의적인 세계인식을 용인하는 제도권 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다. 그러나 현재의 생태담론은 자신의 '입장'에 따른 무모한 '주장'과 '실천'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 다이내믹한 ‘대화’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소수의 에피고넨들만으로 힘겹게 유지될 뿐이다.

그 에피고넨들이 대중들 및 지역주민들과 실천하는 행동은 새만금사업, 핵폐기장 설치반대, 파병반대를 위한 온갖 육탄저지 운동이다. 그리고 지역 이기주의와의 결합이다. ‘생명’과 ‘자연’은 무조건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이고, 그런 생명과 자연이 ‘보상금’을 위한 희생양으로 내걸리는 게 오늘날 환경운동의 현실이다. 하승우 경희대 강사(정치사상)은 이런 견해에 대해 너무 '중앙'의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지역단위의 자치운동, 환경운동은 의미있는 실천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매체에서 이슈파이팅 위주로 활동하는 중앙시민운동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방의 의미있는 실천이 주목을 받지못한다는 환경운동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지적이다.

생태적 삶은 민주주의의 심화와 함께 가는 것

하지만 현재 지역단위 운동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생태-아나키즘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아나키즘이라는 것이 자생적 이념이 아니고 '수입된 이념'이라 한국적 현실과 맞지 않아 지속성을 갖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홍규 교수는 지난 부안사태 때 자발적 시민불복종 운동을 조직해서 그것을 시민자치운동, 반핵, 반원자력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열심히 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일회성 사건으로 그쳤다. 박 교수는 여기서 “정치적인 민주화가 없는 생태운동이 참 무의미하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개별적 생태운동도 지금처럼 겉옷만 걸친 형식적인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는 자각이다. 그렇다면 생태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 민주주의를 실질화, 토착화시키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전혀 뒷전의 일로 취급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개발과 투자를 다른 한쪽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를 지겹도록 되풀이하고 온갖 잡스러운 논리들을 통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오늘날 생태적 주장들도 이런 혼란지중에 속해있다. 생태담론도 ‘생태화 이후의 생태주의’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다수 대중의 표면적 의식이 생태화됐고, 일부 정부기구와 기업들이 최소한의 생태적 장치들을 갖췄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안 생태운동이 부딪힌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생태주의 10년사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고, 새로운 방향설정을 하기 위한 노력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제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생태주의가 민주주의와 만나는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의를 재정의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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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기자에게 2004-10-02 09:39:34
이 기사에 나온 여러 교수진들은 어떻게 자기얼굴과 실명을 달며 이런 무식한 망언들을 했을까? 차라리 나 녹색평론 한권도 안읽고, 오래된 미래도 안 읽고 , 김종철 교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데 아는 척 하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 덜 비열했을 텐데,,,
언론의 하나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신들의 논리가 잘못됐다고 자기가 반성한다는 말 하나로 자신의 잘못을 은근 슬쩍 덮어버리려는 모습 정말 역겹다.
스타사상가? 도대체 스타사상가라는 말을 어떻게 그분들한테 붙일수 있는지...

"한쪽에서는 개발과 투자를 다른 한쪽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를 지겹도록 되풀이하고 온갖 잡스러운 논리들을 통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

강기자는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의 목적을 알기나 하는지?
자연을 살리자라는 것이 과연 잡스러운 논리인가? 먼저 궁금한것은 과연 기자라는 사람이 글을 쓸때 어떻게 이렇게 상스러운 단어 사용을 했을까? 하는 것이고, 기사를 쓸때 자신의 논리와 맞지 않다고 이렇게 상대방을 비방해도 되는지,,, 그런 사람이 기자의 직분에 맞는지.. 왜 안짤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제야 녹색평론을 읽겠다고?
이미 깨진 유리병의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지성의 잡지(?)인 교수신문의 기자님이 모르실리도 없으실테고, 당신의 글과 변명의 글은 결국 자신의 얼굴에 침뱉는 격이라는 걸 왜 모르는가?
마지막으로 이 글에 사진과 실명까지 거론했던 다른 교수들중 누군가에게 정말 책 한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무식하게 말할수 있는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정말 교수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이 교수신문 내용으로 아예 박혀버리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editor 2004-09-28 02:16:59
일단 사실에 대한 오류 등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있으며, 지금 녹색평론 과월호들을 하나하나 반성하는 기분으로 다시 읽고 있다. 하지만 교수신문 기사가 아무리 형편없다 해도 아래의 비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게 읽혀서는 곤란하다.
나의 진단 기사는 한 가지 얘기를 하고 있다. 한국 학계 전반이 그렇지만 생태담론계 역시 상호간의 비평적 대화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니 대화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화의 부재가 실제로 생태담론의 약화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초보적이든 심층적이든 국내 産 생태이론의 철학적 전망들이 맞부딪히며 뭔가 소리를 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지적을 녹색평론을 포함해서 학계에 던진 것이다.
먼저 아래의 지적에서 ‘감정’ 섞인 기사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김종철 교수를 ‘한단계 아래’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몇몇 생태이론가들은 김종철 교수를 ‘이론적’이지 못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는 전공주의와 관련된 학계의 관행적 판단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라는 말을 뒤에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한단계 아래’라는 말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였지, 기자가 한단계 아래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리고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에 대해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호지의 세계화 인식은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라는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라는 것을 최소한 인정한다면, 호지는 세계화에 직면한 한국을 걱정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이나 아니면 경제없는 생태주의를 비판하는 생태경제학자들과 대화할 필요가 있고 이제 그런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스콧 니어링도 마찬가지다. 그가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니어링의 역사인식이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더라도 그가 무의식중에 학습한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을 우리가 꼬집어낼 필요는 있다는 취지의 지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는 다른 우리 식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만들어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마침 박홍규 교수와 최성일 씨의 비판적 코멘트가 있길래 인용한 것인데 착각을 했다. 좀더 철저히 거리를 두고 그들을 보자는 취지로 쓴 것인데 두 사상가를 매도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안타깝다. 물론 나의 잘못이지만.
21세기 사상강좌가 원래의 취지와 다르게 생태-포퓰리즘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 놓여있다. 생명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과 고구려사라는 국가적 차원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이렇게 전국민적으로 동시에 병행해서 일어나는 상황은 매우 이상하다. 역사에 대해서 이토록 배타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명에 대해서 그토록 애착을 보인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인간은 그렇게 모순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순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생태주의의 감성화를 문제 삼았고, 국내 환경운동에서 지역이기주의 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율스님의 숭고한 단식 자체를 비난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숭고성’ 앞에 무조건 엎드리는 생명존중자들의 그 격정적인 감성이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한 것이다. 현재 ‘생태’, ‘평화’와 ‘생명’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거품이 많다. 내가 볼 때는 테러, 이라크전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반사작용도 많이 섞여 있고 이것의 지속성은 테러와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만 겨우 유지될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생각을 한 것은 우리 사회에 성찰 없는 대세가 너무 많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뭔가 이슈가 정해지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갔다가, 또 다른 이슈가 생기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간다. 이것은 2002년 대선 이후로 훨씬 더 심해졌다. 촛불시위 같은 정치적 참여행위도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지는데, 언제까지 촛불을 들고 다닐 것인가. 촛불시위는 하나의 행사처럼 정치적 집단의식의 표출로 끝날 뿐 그런 식의 정치참여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이나, 아니면 한국사회가 그런 식의 대중적 의사표출을 사안마다 끌어낼 정도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과 연결되지 않는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엔 매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 보수신문과 진보진영이 똑같은 부분에서 비슷한 강도로 비판을 한다. 이것을 보면 정말 실망스럽다. 국가현안은 널려있다. 그 현안은 하나의 정부가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에는 매우 다양한 계층과 계급의 입장이 상충하는 격전지다. 그래서 선택과 배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사안에 대해 정부의 ‘개혁성’을 바라는 것은 대단히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태도다. 노무현 정부는 애초에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을 양대이슈로 내걸었다. 그리고 그것이 국민들이 그를 뽑아준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그런데 이를 위한 지지기반의 와해가 너무 심각하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논리와 정부의 정책이 맞지 않으면 그 정부에 대한 지지를 너무나 쉽게 철회한다. 이것은 현 정부의 취약성이 아니라 현 정부를 만든 집단들의 취약성이다. 민주노동당의 제도권화가 참여정부의 정치개혁의 과정 없이 가능했을까. 현재 참여정부의 지지율은 하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개혁과 언론개혁도 힘들다. 언론탄압(?)은 더더욱 어렵다. 진보진영이든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또 다른 급진적 진영이든 자신들의 요구가 현 정부가 진보적 행보를 취하는 것에 어떤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한국의 지식인들은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편하게 유지하기 위해 현 정부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일까. 세계평화와 자연을 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먼 미래의 일 때문에 나라 자체가 제대로 된 나라꼴을 갖추는 일이 뒤로 밀려나는 게 과연 국민된 입장에서 바람직한 것인가. 솔직히 말해 생태문제가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 그리고 ‘모두가 조금씩 가난해지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러한 말을 했을 때 먹혀들어가는 행정부와 국회가 들어서는 게 좋은 게 아닐까. 그게 한두번의 정권교체로 과연 가능한 일일까. 특히 천규석 선생의 ‘쌀과 민주주의’는 이런 참여정부의 성격에 대한 합리적인 검토를 보여주지 못하고, 다만 대안적 민주주의의 토대로 ‘쌀문화’의 중요성을 내놓고, 그 과정에서 현 정부와 우리 사회의 의미있는 제도들을 공격하고 있다. 천 선생의 책을 읽고 이런 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현실적 감각이 매우 의심스럽다.
기사에서 말한 정치의 민주화는 어떻게 보면 서구적 근대의 비판적 토착화다. 대의제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야말로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근대의 유산이 아닌가. 근대의 합리적 유산을 부정하고 넘어서려는 주장들은- 특히 가라타니 고진류의 ‘제비뽑기’ 같은- 어떻게 보면 근대의 실현 이후에 포스트근대도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을까. 최근 ‘사다리 걷어차기’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한국경제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중공업을 육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층생태주의자들이 듣기에 이 말은 천인공노할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생태주의의 문제의식도 중요하고, 장하준 교수의 발언도 중요하다고 다룬다. 둘 다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일까. 교수신문도 이 각각을 동시에 중요한 것으로 다뤄야 할까. 그 각각을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생태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고, 현재 생태담론의 정치적 실천이 문제가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기사에서 나는 녹색평론을 영성적 말씀의 전도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녹색평론이 생태-포퓰리즘으로 될 우려가 있다고 표현한 것은 녹색평론이 너무 자명한 이념적 입장 아래 정치적인 ‘실천’에만 골몰한 것이 아닌가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문맥을 정확하게 읽어줬으면 한다. 영성, 웰빙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떠오르는 트렌드다. 내 기사는 영성, 웰빙에서 드러나는 ‘생태의식의 개인화’는 비판적으로 공론해볼 만한 일이며, 이것을 ‘내부적 반성’ 차원에서 생태담론계가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있다. 꼭 녹색평론을 지목해서 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웰빙을 하지마라, 서구와 교류하지 말라고 말한 적은 결코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자는 반론을 쓴 적이 없다. 사과와 해명을 했다. 그리고 기사의 애초 기획의도는 나중에 좀더 고민해서 반론 형식이든 다른 방식이든 논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냥 솔직하게 해명했는데, 무슨 위풍당당하다는 식의 말을 해가면서 한국기자들, 지성계 전반을 문제삼는 지 모르겠다.
아무튼 세부적인 가지들에서는 문제가 많은 기사이지만, 그 중심줄기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학계와 생태운동계의 상황에 대한 성찰적 인식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고, 그리고 그걸 성공적으로, 성실하게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그렇지 않고 사실오류만 부각시키며 ‘무식’과 ‘자격’을 운운하는 태도는 전혀 지성적이지 않다. 그리고 생태적 삶에 대한 진정한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녹색평론’을 단지 이 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수의 의미있는 담론집단으로만 생각하는 아래의 의견은 그야말로 ‘애독자’로서의 감싸기일 뿐이다. 내용을 보아하니 외국대학에 있는 교수인 것 같은데, 기자의 못난 기사 한편만 대충 읽고 나서 교수들까지 묶어서 깎아내리는 그런 태도는 너무 비이성적이라서 당혹스럽다.

미국에서 2004-09-26 23:46:45
처음에 이 기사를 포워딩해 받았을 때 나로서는 녹색평론의 입장을 높이 평가하는 글이려니 했다.

나는 오랫동안 생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매체의 글을 읽어왔지만 녹색평론만큼 일관성있고, 심도깊게 현재 생태문제의 본질이 결국은 산업발전과 개발이라는 자본주의의 반민중적, 비민주적 특성에 뿌리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루는 잡지를 보지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놀랐다. 물론 몇몇 교수들의 엉터리 인터뷰에서 국내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이 느껴져 거기에도 놀랐지만, 내가 더 놀란 것은 너무나도 궁핍한 한국기자들의 생태인식이었다.

다른 독자의견과 반론, 재반론까지 다 읽은 뒤에는 정말 이런 오보를 너무도 용감하게 마치 심층취재한 기사처럼 내는 교수신문이 도데체 어떤 신문인지가 궁금해졌을 정도였다.

기자는 궁핍한 생태 담론을 운위하면서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교수가 최근에는 "감정"이 섞인 발언을 한다면서 기자 스스로 "감정"적인 말로 녹색평론을 궁핍한 국내 생태담론의 대표적인 사례인 것처럼 늘어놓기 시작한다.

왜 김종철 선생이 다른 교수들보다 "한 단계 아래"인 생태담론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 랭킹을 기자가 평가할 능력이나 되는지도 나로서는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처음부터 이 기사가 주는 궁핍함을 참기 어려웠는데, 구체적인 일례를 드는 부분에 가서는 경악을 금할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Norberg-Hodge가 쓴 Ancient Future는 Ladakh의 전통적인 아름다운 모습과 개방에 의해 소위 서구식 개발로 그 전통이 무너지고 인간이 자연과 균열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잘 그린 수작이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이 책이 묘사한 Tibet이 "정치사회를 제외한 극히 일부분만 보여준다"는 것인지, 이게 도시 무슨 난데없는 홍두깨같은 소리인지, 도데체 그런 엉터리 말을 한 교수의 인터뷰 내용이나 기자의 응수가 무슨 말인지를 알수가 없었다. Ladakh가 나도 모르는 사이 Tibet과 합병이라도 했는가?

Hodge는 내가 있는 대학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데, 소위 서구 생태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서구식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생태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랜 역사동안 형성되어 온 제 3 세계를 비롯한 다수 민중의 공동체적 정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분이다.

또한 Scott Nearing은 나이 40에 미국의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하여 펜실바니아 대학의 경제학 교수자리를 박차고 나와 40년 이상을 땅에 뿌리박은 민주주의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임을 주장한 미국생태운동가이다. 한국에 어떻게해서 "인디언 학살을 개척으로" 찬양한 미제국주의자로 소개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정말 이런 기사라면 이곳 미국에서는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기사라고 할수 있다.

계속되는 녹색평론에 대한 기자의 몰지각한 평가는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녹색평론의 오래된 독자이자, 지금의 생태문제에 대한 위로와 희망을 녹색평론에 걸었던 나로서는 기사의 내용이 무슨 개인의 웰빙, 영성차원에 이르자 정말 이 기자가 책뿐만 아니라 이 잡지라도 읽기나 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녹색평론은 김종철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는 가장 정치적인 잡지이다.

게다가 21세기 사상강좌를 생태 포퓰리즘이라고 칭하는 것은 정말 기자의 무지를 단숨에 보여준다. 21세기 사상강좌에 초대된 Hodge는 말할 것도 없고, Wolfgang Sachs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대표적인 독일생태주의자이다. 그는 가장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사상가이자 생태주의자로 알려진 Ivan Illich Group의 친구이자,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빈곤의 문제와 생태문제를 연결시켜 연구하는 분이다.

이런 분들까지 서구 제국주의자라는 식으로 몰아부치는 무지한 용기도 놀랍지만 서구에서도 가장 변방에서 어렵게 싸우고 잇는 이런 분들까지 떨쳐버리고 어떻게 전지구적으로 망가지고 있는 현재의 지구생태문제를 해결해본단 말인지 도데체 이해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국내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인식을 볼 뿐이었다.

생태문제는 한국만의 문제도 아닐 뿐아니라 한국 혼자서만 해결볼수 있는 국지적인 것도 아니다. 너무도 지적할게 많은 기사여서 독자의견 적기도 수월하지않은데, 마지막으로 국내생태운동을 "육탄공격"운운한 부분은 정말 지적하고 싶다.

새만금 삼보일배는 이곳 미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내가 알기로 미국의 환경시민단체가 동반하여 삼보일배를 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비폭력 환경운동의 일환으로서 이곳 서구 환경운동에도 큰 전환점을 주었다고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분들의 고행을 지역이기주의와 결합 운운하며 육탄공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정말 이 기사가 한 기자의 문제라기 보다는 교수신문 편집진의 자질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지율스님의 글은 영국에서 나오는 Resurgence라는 생태잡지에서 처음 읽고 놀라 그동안 관심있게 보아온터인데 생명을 건 단식을 고귀한 희생으로 보지않고 육탄공격으로 보다니, 그렇다면 도데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생태운동을 하라는 말인가? 이런 식의 육탄 공격도 하지마라, 웰빙도 하지마라, 서구와 교류하지도 마라,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생태문제를 풀 수 있는지 답을 알려달라. 정치적 민주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데 그게 무엇을 말하는가?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자본주의식의 난개발이 투표로 저지될 수 있다는 얘기인가?

마지막으로 기자의 재반론을 보고 나로서는 한국기자들의 용맹에 혀를 내두룰 수 밖에 없었다.

<쌀과 민주주의>를 3분의 1밖에 안읽었고, 김종철 선생에게 메일로 설문지를 돌렸다는 변명은 그야말로 사실에 충실해야하고 최대한 취재원과 충분히 접촉하고 기사를 써야한다는 기자로서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음을 시인한 것인데, 그 자세가 너무도 위풍당당해서 거의 엄숙하기조차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오보임을 시인했으면 여기같으면 당장 신문사측에서 정중 사과보도하고 해당기자는 문책당한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서 그래도 제목을 보면 이 신문이 한국의 가장 내로라하는 지식층인 교수들을 상대로 하는 신문인 것 같은데, 기자의 부도덕성과 불성실성, 그것을 부주의하게 넘긴 편집진의 비전문가적 해이와 독자에 대한 무시까지 모두 한번에 파악이 되어 신문과 독자자체의 수준까지도 가름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교수신문의 수준과 그 신문을 읽는 한국 지성인의 전당이라는 교수들의 수준까지 알게 된 셈이다. 그게 더 슬프다, 한국의 궁핍한 생태담론보다 더 궁핍한 저널리즘의 수준과 지성인의 수준때문에 나는 정말로 오늘 큰 슬픔을 느꼈다.

나그네 2004-09-24 13:15:39
한국의 생태 담론의 현실이 척박한 건 사실이다.
그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주류 사회는
아직 좌파건 우파건 경제 성장에 토대를 둔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 체제를 넘어서는 이렇다할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녹색 평론>의 독자로서 평가해볼 때, <녹색 평론>이야말로 단순히 제도화된 생태주의 담론의 소개를 넘어서, 근원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와 생태주의의 접점을 모색해온 잡지라고 말할 수 있다.
기자와 박홍규 교수가 이토록 감정적 언사로 이 잡지와 발행인을 매도하려면 보다 합당한 논리를 가지고 비판을 해야 옳을 것이다.

지나가다 2004-09-23 16:08:49
아무리 교수신문이라 교수들끼리 본다지만 명색이 신문이라는 타이틀을 걸고있는 한 최소한 기사가 정확은 해야한다.

<오래된 미래>는 여러 학교에서 대학 교양 필독서로 정해질 만큼 훌륭한 책이며, 나 자신도 학생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있다.

박홍규 교수의 멋진 일갈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이 티벳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라다크에 관한 것으로 라다크는 티벳이 아니고 인도 북부에 위치한 다른 지역이다.

설마 티벳과 라다크가 같은 나라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테고, 그게 아니라면 박교수나 기자가 책을 읽었는지가 의심스럽다. 만약 그래도 헬레나가 티벳트에도 관심을 가져야지 왜 라다크 얘기만 하냐는 차원에서 쓴 비판이라면 이거야말로 짜장면 집에 가서 왜 스파게티는 안파느냐고 주인을 야단치는 것과 같다. 손님의 취향에 맞게 골라먹으면 되는 건데 왜 모두 다 한 집에서 똑같이 취급하지 않느냐고, 핏대를 올리는 꼴이다.

그리고 박교수가 지적하고 강성민 기자가 그대로 동의하며 인용한 정치적 민주주의 논의가 녹색평론에서 나온 <쌀과 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읽어보고 쓴 기사인지 불분명한 것이 <쌀과 민주주의>에서 강조하는 것이 쌀이라는 것이 이 땅의 민중들의 지역 자치와 자율이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생태 담론 따로있고, 정치적 민주주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와 생태는 한 몸이라는 얘기를 저자가 하고있는데, 이것과 박홍규 교수의 주장, 강성민 기자의 입장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르지도 않은데 비판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기사가 정확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해서 마구잡이 비판으로 씌여졌을 뿐아니라, 서구 사상가들을 서구사상의 답습이라는 차원에서 무차별 비판을 일삼고 있는데 그런 강성민 기자의 글 자체는 왜 그리 외래어가 남발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기자야말로 서구에 대한 모방이 너무 심한 거이 아닌가? 가령 생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매너리즘, 에세이스트, 트렌드, 시스템, 여기까진 그렇다치더라도 마지막에 에피고넨이라는 용어까지, 너무 서구 사대주의 언어숭배가 체화된게 아닌가 싶다.

교수신문의 교수 독자들이 모두 영어 전공자들이란 말인가 최소한 앞으로는 기본적인 국어의 문장력을 갖추고, 기본적인 사실적 토대위에 합리적이고 설득력이는 비판을 하길 바란다. 아무리 엉터리 교수가 많다지만 그래도 교수신문 읽을 정도면 국어 수준이나, 일반 교양수준이 기자보다 못하지 않다는 점도 인식하면 좋겠다.

앞으로 최소한 "신문"으로서의 기본이라도 훼손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 오랜 교수신문의 정기독자로서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