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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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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21.04.1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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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 송경호 외 3명 옮김 | 여문책 | 504쪽

완역본 『서양사정』의 체제

이 책은 『서양사정』이라는 제목 아래 1866년에 「초편」, 1867년에 「외편」, 1869년에 「2편」이 출간되었다. 따라서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기획 의도로 출간된 세 권의 책을 한 권의 번역본에 담은 이 완역본은 체제상의 구성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모든 편이 서양의 전반적인 실정과 정치풍속, 역사, 문화 등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3책을 독립된 낱권으로 읽어도 무방하지만 ‘서양사정’이라는 큰 주제 아래 전체를 한 권으로 읽는 편이 더 유익할 것이다.

후쿠자와는 1860년에 미국을 다녀왔고 1862년부터 1년여 간 분큐유럽사절단의 통역관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서양사정』 「초편」은 바로 그 기간 동안 후쿠자와가 작성한 일지인 『서양수장西航手帳』과 유럽에서 수집해온 자료, 그리고 막부가 소장하고 있던 서양 서적 등에 기초해 1866년부터 찬집纂輯한 것이다. 「초편」의 기획 의도는 당대 일본에서 충분히 소개되지 못한 서양의 정치풍속을 나라별로 사기史記, 정치, 육해군, 재정출납의 네 항목으로 나누어 전달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초편」의 2권과 3권은 아메리카합중국, 네덜란드, 잉글랜드의 세 나라에 대해 네 항목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만 1권은 서양의 일반 현황을 주제별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19세기 산업혁명 이후의 발전상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비고의 첫머리에서는 서구를 좇아가야 하는 일본에 요구되는 서양 정치의 모습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문명의 정치 6조’는 그 요체에 해당한다. 조선의 근대를 추구했던 유길준은 이 6조를 『서유견문』에 전재하면서 통치의 근본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외편」은 후쿠자와가 자신이 알게 된 새로운 서양 지식을 일본 사회에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갑작스럽게 기획되었다. 1867년 1월 군함 인수를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시 미국을 방문한 후쿠자와는 미국에서 새로운 서양 서적을 입수했는데, 바로 버튼John Hill Burton의 Political Economy for Use in Schools and Private Instruction(PE)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해 정신적으로 큰 자극을 받은 그는 이 글들에서 새롭게 배운 서구 문명의 정수를 일본 사회에 바로 알리고자 했다. 따라서 기존 출판 계획을 바꿔 이 책의 번역본을 「외편」으로 출간했다. 「외편」 역시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편」 또한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인간의 통의’와 ‘징세론’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외편」에서 설명이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하고 있다. ‘통의’란 ‘right’의 번역어로 아직 ‘right’의 번역어가 정착되기 이전에 후쿠자와가 썼던 용어다. 그는 「외편」에서 버튼의 ‘right’에 관한 논의를 번역했지만, 이 개념에 생소했던 일본인에게 그 실체를 분명히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글을 번역해서 이 권에 삽입했다. 블랙스톤은 18세기 영국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 그가 저술한 『잉글랜드법 주해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후쿠자와는 이 책의 축약판 일부를 번역했다. 또한 「외편」에서 이미 논한 정부의 직분을 좀 더 상술하기 위해 웨일랜드Francis Wayland의 『정치경제학의 요소Elements of Political Economy』를 번역했다. 미국 출생의 웨일랜드는 침례교 목사로 활동하다 1827년 브라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해서 교육 사업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종교적 자유주의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을 주창했던 자유주의자였다. 이런 점에서는 버튼과 입장을 같이했으며, 『정치경제학의 요소』는 그의 이러한 입장을 잘 드러내는 정치경제학 교과서였다. 그리고 2권과 3권은 「1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러시아와 프랑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추가했다.

동아시아의 근대 사회 형성에서 주요 개념을 구축하는 작업

19세기는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열풍이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 세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제국주의적 침탈에 힘입어 풍부해진 자금력을 바탕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미국 등의 열강은 끊임없이 제3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식민지로 삼거나 문호를 개방하라고 압박해댔다. 그중 일본은 에도시대 막부 말기에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천문학, 물리학, 의학, 지리학 등의 앞선 학문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고,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아나갔다.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과는 확연히 다른 서구의 사상, 정치체제, 문화, 기술력 등을 접하고 이를 자국에 접목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핵심 개념들을 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번역의 중요성이 매우 높아진 만큼 번역 작업에 국가 차원에서 막대한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주요 학술용어를 일본의 번역어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중후반대에 생애 대부분을 보낸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양의 온갖 개념들을 놓고 치열한 고뇌의 시간을 보냈으며, 『서양사정』에는 이런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 잘 묻어나 있다. 당시의 동양과는 달리 서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인데, 후쿠자와는 이런 개념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 독자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책 곳곳에 ‘할주割註’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증기기관, 증기선, 증기차, 전신기, 가스등 같은 선진기술뿐 아니라 도서관, 각종 병원과 학교 시설, 박람회 등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나아가 제국주의자의 침탈을 막고 열강에 끼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당시 일본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불기독립不羈獨立’ 혹은 ‘독립불기’, ‘불기자유’ 혹은 ‘자유불기’, ‘일신독립’, ‘독립자존’ 등 ‘독립’과 ‘자유’를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미국,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프랑스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각 나라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고 각국의 정치체제와 육해군의 수준, 재정상태를 꼼꼼하게 서술해놓았다. 이처럼 150여 년 전 동양의 젊은 지식인이 바라본 당시 서구의 제반사정 자체가 흥미로운 읽을거리일 뿐 아니라 정치사, 정치사상사, 개념사 등의 연구에도 소중한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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