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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旅行에서 遊方으로
에세이_旅行에서 遊方으로
  • 주영하 정신문화연구원
  • 승인 2004.08.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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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일이다. 대학 졸업을 턱 앞에 둔 어느 가을, 마지막 대학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친구 둘과 함께 무작정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차가 고속도로를 앉자마자 우리는 일탈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미리 사 둔 맥주로 목을 축이며 차창 밖의 풍경에, 좋은 사람들과의 여행에 한껏 들썩이고 있었다. 법주사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대학 내내 답사가 아니면 변변한 여행을 해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무작정 떠난 길은 평소에 결코 꿈꿔보지 못했던 ‘사치’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마치 어른들 흉내라도 내듯이 그럴듯한 식당에 앉아 파전에 동동주를 시켜 놓고,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 푹 빠졌다.

그런데 문제는 저녁이 돼서야 일어났다. 법주사의 장대함과 해질녘의 가을 풍경을 온통 눈 속에 집어넣고 돌아선 순간, 세 사람의 주머니가 거의 텅 비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순간 돌아갈 서울 길은 만 리 길도 더 돼 보였고, 어둠과 함께 엄습하는 위장의 아우성도 참아내기 어렵게 됐다. 이른바 생각지도 않았던 무전여행을 해야 할 처지에 우리는 처하고 말았다. 그래서 법주사 경내의 대형 쇠솥에 들어 있던 시줏돈을 어떻게 해 볼까 궁리를 내 보기도 하고, 서울에서 온 듯한 관광버스를 빌려 탈 생각도 하면서 절 입구를 왔다 갔다 하기를 한 시간. 나는 용기를 내서 법주사 안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낮에 법주사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때 눈여겨봤던 한 스님을 찾아, 사정을 말하고 돈을 꿔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그 스님에게 우리의 경솔함을 어떻게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문득 불교개론 수?때 들었던 ‘遊方’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다른 말로 ‘遊行’이라고도 하는 이 말은 스님들이 사방을 다니며 수행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의 처지를 설득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그 스님은 나의 설명을 듣고, 큰 스님에게 자기 일처럼 부탁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록 서울로 돌아온 후 장문의 감사 편지와 함께 빌린 돈을 곧장 갚았지만, 사실 우리의 법주사행은 결코 ‘유방’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무작정 떠난 치기어린 行旅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그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여행은 ‘유방’으로 변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나그네처럼 무작정 이 길 저 길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옛 사람들이 남긴 문화유산도, 다른 나라의 풍경도 여행에서는 중요하지만, ‘유방’의 핵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며, 박물관의 전시실을 걷듯이 돌아다니는 여행은 결코 참다운 여행의 아름다움이 아님을 나는 그 사건 이후 깨달았다.

모두 동의하듯이 교수라는 직업은 학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비록 전공분야가 실타래처럼 갈라져 있지만, 이것 하나만은 모두가 같다. 그래서 교수를 두고, 절간의 스님과 같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직업적 일상과 그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탓에 어떤 분들은 여행을 한다고 하면서 직업적인 답사에 매달리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아예 일상에서 벗어나 ‘회취’ 나온 놀이꾼처럼 변하기도 한다. 그거야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修行之道가 펼쳐지는 여행이면 더욱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유방’과 같은 여행을 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현지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믿는다. 타지로 여행을 가면 나는 반드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쯤 내가 묵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는 버릇이 있다. 아침의 고요함을 틈타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동네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아침에 보는 동네의 모습은 낮이나 밤에 마주쳤던 그 얼굴이 아니다. 마치 아침 공기처럼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온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고독을 이 시간에 맘껏 즐긴다. 하지만 반드시 아침이 아니라도 좋다.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낯선 사람과 낯선 풍경과 사귈 수 있다. 비록 그 사람이 동업의 지식인이 아니라도 좋다. 오히려 택시기사나 식당의 웨이터와 같은 일반인과의 이야기 주고받기는 우리의 여행을 더욱 ‘유행’의 길로 다가가게 한다. 여행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일이다. 하지만 ‘유행’은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을 가리킨다. 자, 이제 자신을 다스리는 ‘유행’의 길을 찾으려 여행을 떠나보자.

주영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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