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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의 비디오 샵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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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희복 진주교대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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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모의 영상미학을 '강추'한다

세기와 천년의 전환기에, 휴머니즘을 한 번쯤 되매길 수 있었으리라. 동시대의 고유한 역사 경험에 따라 항상 그랬듯이, 위기의 사상인 동시에 전환기의 사상이기도 했던 휴머니즘이 우리 시대 한 가치의 척도로서 성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영화 가운데 전환기의 휴머니즘을 잘 구현한 것은 아마도 ‘율리시즈의 시선’일 성싶다. 그리스 출신의 창의적인 시네아스트로 정평이 나 있는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사라예보의 총성에서부터 코소보 참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인간 역사의 비극을 집약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발칸 반도의 悲劇史를 배경으로 삼았다.

영화는 그리스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A가 미공개된 다큐필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율리시즈는 오디세우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주역으로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귀향의 여정처럼 A는 잃어버린 것, 인간적인 것, 순수하고도 가치로운 것들의 상징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 영화는 정신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인간에 대한 성찰, 인간성에 관한 심원한 통찰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대미를 장식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제작은 비교적 오래 지났지만 수 년 전에 비디오로 출시된 아트영화 ‘거울’ 역시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를 명징하게 영상화한 작품이다. 러시아의 영상시인 타르고프스키가 남긴 또 하나 주옥의 명편인 ‘거울’……. 여기에서의 거울 이미지가 나르시스의 황홀경이라기보다는 자아를 응시하고 세계를 관조하는 자의 空의 상징, 시간의 개념마저 무화시킨 절대적인 공간의 표상에 가깝다는 점에서 사뭇 동양적이다. 그가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기 때문일까. 이 영화는 매우 난해하지만 서정적이면서도 기록적인 回想의 양식이 지닌 시적인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첸 카이거의 ‘현 위의 인생’도 인간과 인간성에 대해 심오한 물음을 던진 영화다. 맹인 사제의 눈뜸에 관한 망집은 너무도 처연하다. 세상의 화음을 추구하는 음유시인은 차라리 聖者였다. 우리 모두 언젠가 노래하리, 슬픔을 잊고, 눈물을 씻고, 목청 돋구어 노래하리……. 이 희망찬 화평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노인은 끝내 좌절한다. 여기에 幻惑의 빛이 슬몃 머문다.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영화로서는 회의적이며 또한 허무적이다.

10여 년 전부터 아시아 영화가 국제적인 무대의 관심사가 됐다.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이 영화의 새로운 예술성을 발현함으로써 한때 선풍을 일으켰고, 최근에는 우리 영화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인다. 아시아 영화에는 아시아인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반영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아시아 목가주의(pastoralism) 영화가 볼만한 것의 목록에 굳건히 자리를 차지한다.

장예모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은 시쳇말로 강추에 해당한다. 도회지 출신의 총각선생과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시골 처녀의 첫 만남에서부터 영상미의 완결된 수려함은 극에 달한다. 노란 빛 색채감이 그윽히 지배하는 늦가을의 풍광 속에서 잎새 무성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사잇길로 눈길을 주는 처녀의 경이에 찬 시점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 같다. 이때 카메라는 물결처럼 나부끼면서 부드럽게 움직인다. 왠지 모를 가슴 설렘과 벅찬 감회, 인내와 기다림의 情調, 또한 모듬살이를 구성하는 전통적인 공동의 善 등이 유교적인 성정론에 바탕을 둔 장예모 영상 미학과 잘 어울리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게 이채를 띤 조화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영화 ‘러브레터’는 운명의 폭설 속에서 핀 순백의 사랑을 구가했다. 눈 덮인 세상에 슬픔의 정조를 눈 시리게 띄우는 그 순백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국경을 넘어서 정서의 호감 내지 교감을 이룩한 것이라 여겨진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메아리로나마 죽은 연인의 영혼을 확인하려는 여인의 애처러운 손짓, 몸짓, 말짓은 마치 초혼굿하는 무녀와도 같다. (아이아적인 공동의 정서가 확인되는 목가주의 영화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와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등이 있다.)

그밖에 집에서 볼 수 있는 영화로, ‘마이크로코스모스’와 ‘크루서블’과 ‘로망스’를 추천하고 싶다. 이 세 영화는 제 각각의 개성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마이크로코스모스’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곤충이 허물을 벗거나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의 한 순간도, 심지어는 풀잎에 맺혀 있는 물의 한 방울 미세함도, 카메라는 결코 놓치는 일이 없다. 소우주의 신비는 필경 유기적인 관계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뭇 생명에 佛性이 깃들여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도, 우주 속에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간에 보이지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 신과학자들의 주장도, 정치하게 제작된 이 한 편의 영화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크루서블’은 중세의 마녀사냥을 소재로 한 것으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화두는 이를테면 “이보다 가혹한 시련(crucible)은 없다”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아서 밀러의 희곡인데, 1953년 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에서 초연하여 지금까지 197회의 공연 기록을 가지고 있다. 원작 희곡이 무대에 초연될 무렵에 미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매카시즘의 돌풍으로 세상이 뒤집히고 있었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정치적인 희생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레드 헌트, 즉 빨갱이 사냥의 표적이 되곤 했다.

‘로망스’는 여성성, 여성의 섹스,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 영화다. 섹슈얼리티의 혼란에 시달리는 한 젊은 여성이 애인 아닌 남자에게 묶이고 싶어하고 스스로 찢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의 성적 방황은 로망스 즉 모험과 탐색의 이야기로 이룩돼간다. 영화 ‘로망스’는 로맨스가 없다. 오히려 로맨틱한 여운은 철저히 전복된다. 이 영화를 보면, 청순하고 신비적인 것에다 나른하고도 감미롭고, 때로는 퇴폐적인 권태의 이미지가 덧보태어지는 여배우의 고뇌에 찬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임권택은 ‘취화선’을 통해 2002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기인 화가의 광기 어린 예술혼을 주제로 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토착적인 영상미를 빚어내었다. ‘서편제’ 이후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에 기여해 왔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히 장인이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일본의 평범한 만화를 재구성해 국제적인 수준의 비범한 영화로 새롭게 바꿨다. 근친상간이나 복수는 우리의 정서로는 극단적인 금기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를 상생의 희망이 엿보이는 雪原으로 잘 이끈 것은 역량의 돋보임 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송희복 / 진주교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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