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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카운티에 산다는 건
오렌지카운티에 산다는 건
  • 교수신문
  • 승인 2021.03.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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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혜 지음 | 푸른길 | 252쪽

 

장소심리학의 눈으로 장소의 의미를 섬세하게 살피다
지리학자로서, 재미 교포로서, 엄마와 여성으로서
오렌지카운티에 산다는 것

영화 「미나리」가 상을 휩쓸며 연일 화제다.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낯선 땅에 뿌리내린 이민 가족의 생존기를 따뜻한 가족애로 풀어낸 영화이다. 지리학에서는 흔히 공간(space)과 장소(place)의 의미를 구분한다. 공간이 객관적이고 도표 위에 찍힌 점처럼 차가운 의미를 지닌다면, 장소는 주관적이며 개인의 특별한 추억과 감정이 새겨진 곳을 말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낯선 곳에서의 ‘뿌리내림’은 공간이 장소가 되어 가는 과정과도 닿아 있다. 『오렌지카운티에 산다는 건』은 지리학자로서 오랜 시간 장소감(Sense of Place)을 연구해 온 저자 오인혜가 낯선 공간이 장소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리학의 개념과 미국 오렌지카운티로 떠난 개인의 이민 경험을 버무려 절묘하게 설명해 낸 책이다.

이민자들이 종종 자신을 교포 사회와 고국 모두에서 객(客)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에서 이중 이방인이라 표현하듯, 저자 역시 이민 생활이 마냥 꿈같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간을 고스란히 통과한 끝에 장소 정체성(place identity), 토포필리아(장소애), 토포포비아(장소 공포감), 트로포필리아(유목애) 등의 지리학 개념은 더 선명해졌으며, 나아가 장소심리학 분야를 새로 개척하기까지 ‘장소’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울림 있는 통찰을 얻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녀가 삶으로 실감한, 장소와 관련한 지리학의 주요 개념을 오렌지카운티에서의 일화와 곁들여 소개하고, 재미 교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한다. 재미 교포 이민사부터 그들이 지닌 다중 정체성을 세대별로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새로운 공간에서 어떻게 장소 정체성을 구성해 가는지를 섬세히 따라갔다.

“제3의 공간, 장소가 필요하다.”
격식과 서열이 없고, 소박하며, 수다가 있고, 출입의 자유와 음식이 있는 곳

심리학에서는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감정과 태도, 생각과 신념이 그 사람의 행동을 더 잘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이것을 지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을 둘러싼 생활공간과 자연환경이 하나의 자극으로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면 장소감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곧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저자가 중요시하는 장소심리학의 눈이다. 북한인권법과 탈북고아입양법 등의 대북 인권 활동이 비교적 재미 교포 2세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저자는 타자의 ‘공간’이 장소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장소’로 인식될 수 있음을 다시금 되짚었다.

장소감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고유하게 형성되지만, 한편으론 이미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사회적으로 제한되어 있기도 하다. 집 주변을 그려 보는 멘탈맵 실험에서 경제력과 학력이 높은 집단은 집에서 보다 먼 다양한 지역과 의미 있는 장소를 상세히 그려 냈지만 반대의 경우는 집을 중심으로 가까운 몇 곳만을 단순히 표시해 낼 수 있었다. 이렇듯 『오렌지카운티에 산다는 건』은 사회지리학적인 시선으로 장소를 둘러싼 깊이 있는 사유를 이어 나간다. 장소감이 개인의 정체성, 존재감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를 꾸준히 짚으며, 사람과 장소를 근원적으로 성찰하여 인간의 실존을 우리 일상에서 되돌아보게끔 한다.

나는 가끔 이곳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봐 두렵다. 불법체류자의 인간적 실존을 보호하던 제도의 폐지를 둘러싸고 벌인 시위에서 시위대의 노란 팻말에 적힌 “Home Is Here(내 집은 바로 이곳)”를 보고 정치와 사법제도가 과연 장소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준거까지 박탈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_8쪽

그래, 이곳, 오렌지카운티!
 

그렇다면 오렌지카운티에서는 어떤 장면과 공간들이 장소감을 형성해 갔을까? 저자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시절 어서 이곳에 적응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듯한, 그러지 못하면 도태된다고 엄포를 놓는 것만 같은 웅장한 바위산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친근한 모습으로 뒤바뀌었으며, 심지어는 잊을 만하면 몸과 마음을 흔드는 지진, 타들어 가는 듯한 오랜 가뭄, 오르내리는 기름값 등 모든 크고 작은 사건마저도 삶 속에 새겨져 오렌지카운티를 드러낸다고 한다.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렌지카운티의 곳곳은 머나먼 낯선 곳을 가리키기보다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인 정서 덕분인지 도리어 동네의 반가운 장소들이 생각나게끔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공간 중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가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을 마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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