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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김성도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318호)을 읽고
반론: 김성도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318호)을 읽고
  • 박상진 부산외대
  • 승인 2004.07.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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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본질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기대한다"

▲ © yes24
세계에서 천만 부 이상이 팔린 초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은 흥미로운 추리소설 이외에 다른 의미는 우리에게 없는가. 2002년 초여름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붉은 악마의 열기는 과연 성숙한 한국 국민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장이었는가. 식민지와 분단체제 속에서 강요된 근대화를 겪은 우리에게 다른 종류의 근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열림의 이론의 관점에서 떠오르는 물음들이다. 그런 물음들을 다루면서, 세계화와 제국을 겪으면서 우리의 삶과 이론이 얇아지고 가벼워진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다시 생각하는 것, 즉 자유로운 해석은 가능하고 필요하다.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는 우리의 삶과 세계를 가리킨다. 삶과 세계를 넘어선 곳을 상상할 수 없듯이, 죽음조차도 삶의 윤리와 실천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라는 면에서 삶과 분리되지 않듯이, 텍스트 외부는 없다. 데리다 식의 사유 방식에 힘입어 자유로운 해석이 뻗어나가는 열린 범위와 역할을 생각했다. 열린 해석은 어떤 사고가 지닐 수 있는 독단적 구조에서 탈출하고 그 구조의 변두리에서 개별과 구체의 자리를 구성하게 해준다.

분명 나는 개별자로서의 주체를 상상한다. 그러한 주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동안 논의되어온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 그런대로 수습해야 열림의 이론은 출발할 수 있었다. 출발이라고 하지만, 실은 열림의 이론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여러 입장들을 검토하여 콘텍스트 의존적인 의식적 개인 주체를 입안했지만, 보완할 여지를 크게 남겨두고 있는 실정이다.

평자가 얘기하는 최신 기호학에 대해서 공감한다. 거기에 나는 기호학자라기보다는 이론이라는 더 일반적 맥락에서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평자는 소쉬르와 에코, 푸코 등에 대한 ‘탄탄한 연구’를 요구하지만, 내 책은 그들에 대한 연구서가 아니다 (나는 에코에 대한 연구서로 ‘에코 기호학 비판 - 열림의 이론을 향하여’를 작년에 출간했다). 또 기호학 연구서도 아니다. 열림의 이론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열림에 대한 온전한 비판을, 그 위에서 또 다른 해체를, 그를 통해 또 다른 재구성의 발전된 지평을 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열림은 스스로 열림의 과정으로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화와 제국의 시대가 사고의 단일성 위에서 사고의 단일성을 조장한다는 진단 아래 그러한 사고의 틀을 점검하고 해석의 자유의 공간을 열고자 했다. 개인 주체의 해석의 자유와 윤리.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과 회의보다는 의미와 가능성을 더 희망차게 조명하고 싶었다. 책에 대한 서평이라면 이러한 저자의 목표에 대한 평가와 제안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의심과 회의조차 없었다. 내가 말하는 개인 주체, 콘텍스트, 합의와 불일치의 관계, 권력, 상대주의, 마르크스, 데리다, 하이데거, 바티모, 심지어 책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불교적 사유 따위의 아직은 미진한 구석들이 열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제안 받으려는 기대는 지나친 것이었다.

평자는 해석의 윤리의 정의가 내 책 어디에도 없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해석의 윤리는, 책의 내용을 반복하자면,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타자의 자리에서 해석을 하는 것에서 나온다. 이때 타자의 자리는 고정되지 않는다. 끝없는 타자화의 과정에서 해석의 대상과 주체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해석은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성을 거듭한다.

평자의 표현으로, 내가 그렇게 심하게 때렸다는 에코는 그런 나의 글에 대해 공식적으로 자기 입장을 밝혔지, 나를 틀렸다거나 무책임하다고 하지 않았고, 지엽적인 것들을 들먹이며 발목을 잡지도 않았다(‘Illuminating Eco: In the Boundaries of Interpretation(Ashgate, 2004)’ 참조). 그런 면에서 에코는 이론가로서 자신의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자세를 견지한다고 생각하며, 그럼으로써 나는 에코에 대한 최신의 열린 해석의 흐름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평자가 내게 물은 ‘글쓰기의 윤리’는 이러한 해석의 윤리의 연장선 위에 있다. 나는 평자에게 이러한 해석의 윤리에 입각한 글쓰기를 되돌려 권하고 싶다. 그러면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따옴표를 잘못 찍어 내가 한 말이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불성실은 없을 것이고, ‘장미의 이름’ 비평과 붉은 악마의 ‘시사평론’이 열린 읽기와 지식의 점검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글들임을 간파하지 못할 리가 없으며, ‘본인의 사색과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이라는 무책임한 진단을 내리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기대한다.

나는 열림의 실천을 여러 방향에서 시도하고 있다. 총체화의 테러를 저지르는 제국의 상황을 떠올리고, 그러한 상황을 재현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모순과 무능력을 반성하고,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적 사고를 통하여 삶과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고, 끊임없는 타자화의 시공으로서의 지중해 모델을 일구어내며, 그를 통해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구상해본다. 퍽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다 우리의 삶을 직접 둘러싼 것들이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런 작업을 무척이나 어설프더라도 나의 관점과 이론에서 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열림의 실천, 나의 실천을 행하는 길이며, 제국적 상황에서 더욱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은 고단하나 불혹이기에 흔들림 없이 나아가려 한다.

필자는 옥스퍼드대에서 '텍스트, 컨텍스트, 주변부 - 움베르토 에코의 열림 개념의 재평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식의 미적 형식과 한국인의 정체성', '유연한 모더니티 - 근대성 극복의 한 방법' 등의 논문이, '에코 기호학 비판 - 열림의 이론을 향하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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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2004-07-08 22:15:21
영 읽히지 않는 그 책은 거의 절망입니다.
내용을 알고는 번역을 하셨는지요?
무조건 최신이라...글쎄요,
제대로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