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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美를 논한다_9 여성성
우리시대 美를 논한다_9 여성성
  • 심진경 문학평론가
  • 승인 2004.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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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성'이 존재의 근거...형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정체성

1990년대 문학, 특히 여성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여성성’이다. 이는 모성성, 여성적 글쓰기 등과 같은 傍系 주제와 함께 여성주의 문학을 특징짓는 핵심 주제의 하나로 규정돼 왔다. 그 논의들은 대개 여성/남성의 이분법적 분리에 의거해 여성적인 원리는 주변적인 가치로 남성적인 원리는 중심적인 가치로 상정한 후 여성성을 결핍, 상실, 주변성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남성적인 원리를 물질적?세속적인 현실원리로 여성적인 원리를 ‘인내와 사랑의 원리’로 대립시킨 후 여성적인 원리를 남성적 원리를 극복하는 대응원리로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여성/남성’의 위계적인 성별 이분법을 고수하는 이러한 방식은 비록 여성성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남성적 주체를 보편화하는 근대적 사유틀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성을 여성적 경험, 특히 육체적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으로 보는 논의도 많다. 예컨대 성교, 임신, 출산, 수유, 낙태 등과 같은 여성 육체의 경험은 여성적 언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는 여성의 육체를 자기인식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하거나 여성의 성욕을 여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우선시하는 최근의 소설적 경향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여성성에 대한 이해를 생물학적인 것으로 한정지을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은 자동적으로 그들 자신의 언술의 진실성을 담보해준다는 식의 본질주의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여성성을 남성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혹은 여성적 경험의 특성으로만 한정짓는 이러한 논의들은, 그 자체로 여성성을 남성적 가치 체계의 범주 내에서 작동되는 것으로 보는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여성성에 대한 오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여성성에 대해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여성은 ‘자신의 여성성(물론 이는 관습적으로 규정된 것이다)을 망각해버린’ 여성이라는 이리가레이의 진술은, 비록 여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니지만, 어떤 측면에서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남성적 가치체계라는 틀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상징적 규정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성성은 형식의 결여 그 자체를 의미한다. 형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 형식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특정 형식에 부여된 우월감에 대한 거부다. 따라서 여성 성장 소설이나 고백, 혹은 자전적 소설을 여성성이 특권화된 미학적 재현양식으로 규정하는 논의들은, 여성성에 대한 협소한 이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권지예의 ‘아름다운 지옥’이 1990년대 여성문학에서 오히려 퇴보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러한 관습화된 여성성장 소설 장르를 도식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성의 작가로 규정돼온 전경린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의 소설에서 자주 반복되는 가부장제적 질서 안과 바깥이라는 도식은 결국 ‘가부장제’라는 틀을 전제한 도식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즉 그녀들의 여성적 정체성이란 언제나 남성을 대타항으로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남성중심적 질서로부터의 일탈적 욕망은 결국 다른 남성과의 불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전경린 소설의 여성인물들이 표면적으로는 가부장제적 질서 바깥으로의 탈주를 감행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여성에게 부과된 가부장제적 운명을 뒤쫓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경린 소설은 남성중심의 오이디푸스적 서사를 반복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천운영 소설에서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논리에 의해 부과된 여성성의 자질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최근 단편들, 특히 ‘늑대가 왔다’와 ‘명랑’은 기존의 여성성의 통념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여성적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다. 늑대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소녀(‘늑대가 왔다’)나 할머니의 발에 대한 패티쉬를 통해 여성적 욕망을 발견하는 탐미주의자는 모두 기존의 오이디푸스 서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성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성과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최근 신인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천운영식의 그로테스크한 탐미주의자들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다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성이란 특정한 형식적 규정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러한 질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여성성이란 여성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학적인 것과 같은 어떤 것인데 여기서 ‘기호학적인 것’이란 라캉의 실재(the real)에 가까운 개념으로, 상징계 내에서 언어화되지 않으면서도 상징적인 것을 떠받치는 것이다. 즉 부재를 증명하는 부재이자 전복된 텅 빈 중심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기호학적인 것을 아방가르드 텍스트에서 발견하고 있다. 여성성이 문학 그 자체와 맞닿아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문학이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여성성 또한 그러한 부정성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성은 더 이상 여성성이 아니다.


필자는 서강대에서 '1930년대 후반 장편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성작가 친일소설 연구', '한국 근대문학에 나타난 성담론 연구' 등의 논문이, '한국문학과 모성성'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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