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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will do that for you"
"할아버지 will do that for you"
  • 박나영 미국통신원
  • 승인 2004.06.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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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본 기러기 교수

그의 집 앞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는 개 한 마리가 있었고, 옆 집에서 넘어온 감나무 가지가 보였고, 그리고 그 한 귀퉁이에는 아내의 손 맛이 묻어 있는 장독들이 늘어서 있었다.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집을 포기한 것은 아들들의 유학을 결심한 때문이었다. 세 아들을 미국에 보내고, 아내도 한국과 미국을 왕복하며 아들들을 보살펴야 하다 보니 '기러기 아빠' 혼자 그 큰 집을 지키기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십 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미국에 있는 막내 아들 집에 묵고 있다. 연구직으로 재직하던 ㄷ 대학에서 학회 발표가 있고 저서 출판 문제도 있어 한국에 나가야 하지만 미국인 며느리와 아들이 내민 용돈은 고작 50달러(6만원). 그래서 칠순의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제일 싼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처음에는 호텔에 묵으려 했다. 한국에서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도 있는 데에다 미국 시민권을 얻지 못한 관계로 1년에 한번씩 한국에 나와야 하는 바람에 또 친지들의 신세를 지기에는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호텔 앞에서 우연히 가까웠던 친구를 만났다. 그 집에서 몇 주. 그러다 연락이 된 누나 집에서 몇 주. 그리고 동생 집에서 또 몇 주. 이번 여름은 이렇게 해결 됐나 보다. 

그래도 그는 뿌듯하다. 한국에서 중위권 대학에 다니던 아들들은 미국에서 각각 한의사와 공인 회계사가 되었고, 한국에서 그리 성적이 좋지 않던 고등학생 아들은 이제 버젓한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제가 한국에 있었으면 공인 회계사가 될 꿈이나 꾸었겠습니까"라는 둘째 아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의사인 큰아들은 생활이 많이 어려운가 보다. 어제도 아내를 통해 큰며느리가 "왜 아버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지 않느냐"라며 큰아들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손주들이 먹을 것도 마땅치 않다는데. 이번 여름에 가면 한국에 남겨 두었던 작은 아파트를 팔아 아들을 도와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디서 묵어야 하지.

 

석, 박사 유학생 뿐 아니라 학부 유학생들만 해도 이미 '늦은 유학'이라고 투덜대듯 말하곤 한다. 이미 혀가 굳어져 미국의 언어를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국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미국의 문화를 익히기에도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조기 유학'을 보내고 싶어 한다. 특히 그 한계를 직접 경험한 지식인 층의 경우 그 비율이 훨씬 높아진다. 언어와 문화를 익힐 수 있을 때 한 살이라도 빨리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가 어려워도, 나라에서 정책으로 규제해도 조기 유학생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조기 유학은'빠른' 유학일 수도 있지만 미국의 언어를 배우다 한국의 언어를 잊을 수 있는 나이이고, 미국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사이에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잃을 수 있는 나이라는 점에서 '이른' 유학일 수도 있다. 또 하나, 조기 유학의 경우 아이들이 아직 어려 홀로 서기가 힘든 까닭에 '엄마'와 '돈'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이 둘을 고스란히 빼앗겨 버리게 되는 기러기 아빠로서는 그야말로 이른 유학이 아닐 수 없다.

가족이 헤어지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미국에서는 한국인들의 '비이민 소액투자비자(E-2)' 상담이 급증하고 있다. '조기 유학'과 '합법체류 신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수, 의사, 변호사 등 '지식인 층'의 경우에는 문제가 약간 달라진다. 이들이 과연 현재의 신분을 버리고 타지에서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교수의 경우 교환교수로, 의사나 변호사의 경우 새로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아버지가 함께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홀로 남는 '기러기 아빠' 교수, 의사, 변호사가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식들을 외국으로 내보낸 기러기 아빠들일지라도 한국의 아버지는 한국의 아버지다. 하루에 한 번, 아내와 아이들과의 화상채팅으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래며 이들이 기다린 것은 양로원에서 보내는 노년이 아닌, 손주들과 함께 보내는 한국적인 노년이다. 그래서 어느 새 영어를 그보다 더 잘 하게 되어 버린 아내를 볼 때, 미국에서 자리를 잡아 가는 자식들을 볼 때, 며느리가 "할아버지 will do that for you"라고 영어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손주들을 볼 때, 노년의 기러기 아빠들은 그들 사이에서 설 자리를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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