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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史實의 무시가 학문적 완성도 떨어뜨려
사소한 史實의 무시가 학문적 완성도 떨어뜨려
  • 여인석 연세대
  • 승인 2004.06.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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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 이종찬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제 316호)을 읽고

여인석 / 연세대·의사학

[편집자주] 이 글은 교수신문 313호에 이종찬 교수의 저서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근대'(문학과지성사 刊)에 대해 서평을 쓴 여인석 교수가, 서평에 대한 이종찬 교수의 반론을 읽고 쓴 재반론이다.

지난 서평에 대한 저자의 상당히 격앙된 반응을 접하면서 여러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필자의 서평에서 저자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로 인해 저자에게 누가 됐다면 사과한다.

그렇지만 부당하게 여겨지는 발언에 대해서는 다소 변론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먼저 저자는 저자가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해 독자에게 제기한 두 가지 물음에 대해 필자가 전혀 대답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심히 분개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그동안 적지 않은 책을 보아왔지만 저자가 직접 나서서 내 책이 이런저런 측면에서 얼마나 기여하였는지를 평가해달라고 바로 그 책에서 독자에게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더구나 그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평자의 멘탈리티까지 문제 삼는 경우는 더더욱 처음 봤다. 물론 모든 책의 저자에게는 자신의 저서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은 욕구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저자 자신이 이 책의 출판 후 어디엔가 썼듯이 출판된 책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저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책을 평가해주건 말건 그건 독자의 자유에 속한 문제이고 저자가 나서서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시 이 책의 전체적 성격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보겠다. 이 책의 주제가 “동아시아의 세계화”라고 못 박고 동아시아가 세계화되는 양상을 유기적으로 서술했다고 자평하는 저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필자는 이 책의 핵심이 한국 근대의학을 다룬 5장이라고 본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도, 그리고 귀결점도 모두 한국의 역사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생략한 동아시아인의 정체성이 성립가능한지, 그리고 한국인이 서술하는 동아시아 의학사가 한국의학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저자는 필자가 다른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특별히 선교의료에 대해 언급한 것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필자가 이해하기에 동아시아의 세계화에는 무역과 선교가 중요한 두 계기이며, 특히 의료에 관한한 선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계기다. 그리고 한국의 사례를 언급한 것은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상황이 출발점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주로 이차문헌에 의지해 일본과 중국의 사례를 재구성한 것과는 달리 한국의 사례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일차사료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해 저자 자신의 시각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에비슨에 대한 변명’은 분명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와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고, 또 어줍지 않은 기독교인으로서 갖는 정체성과도 관련된 부분이어서 그 부분에 대한 필자 자신의 평가가 반드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역사인식이란 결국 개인이 처한 실존적인 조건의 영향을 받게 돼있는 이상 그러한 상황에서 파생된 필자의 편견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선교의료는 곧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저자의 평가도 그다지 객관적이고 타당한 시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완성도가 낮다”는 평가에 대해 기분이 많이 상한 듯하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출판된 책에 오탈자가 많다면 그 내용에 관계없이 책으로서의 완성도가 높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완성도가 낮다”고 평가한 것은 그런 형식적인 측면에서였다. 거기에 대해 저자는 필자가 “책의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내용들만 들먹이고” 있다고 불만을 표하는데, 설사 전체 흐름과 상관없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한 권의 책에 담아 共刊한 이상 저자는 마땅히 책에 담긴 모든 내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어떤 부분이 전체적 논지와 큰 관계가 없다고 해서 틀리거나 근거 없는 주장의 서술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반론’에서 필자가 원래 해부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쓰고 있는데 필자는 원래 기생충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론 사소한 오류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오류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면(더구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저자가 아무리 심오한 주장을 펼치더라도 책의 전체적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전통의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2장은 중국전통의학사 전공자나, 아니면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한의학 전공자에게 사전에 한번만 검토를 받았어도 초보적인 수준의 오류들이 그대로 활자화돼 책의 전체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다소 이상한 논법으로 이 책에 나타난 오류를 합리화한다. 즉 대가의 책에도 오류는 있다. 따라서 내 책에 오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내 책의 사소한 오류를 문제 삼지 말라. 이상하다. 혼자 읽고 만족할 목적이 아니라 적어도 학문적 목적으로 낸 책이라면 대가의 책이든 소가의 책이든 모두 동일한 기준에 의해 검증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애초부터 대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완성도 높은 연구서를 내놓는 사람이 바로 대가다.

저자가 이미 불만을 표한 바와 같이 필자의 서평은 다소 의도적으로 사소한 부분에 집중됐다. 그렇게 한 것은 저자가 제기한 큰 문제들을 신문서평이라는 제한된 지면 안에서 논의하기 어려웠던 현실적인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소한 부분에 대한 무시가 저자의 학문적 작업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필자의 서평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저자의 혜량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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