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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인생
거리의 인생
  • 교수신문
  • 승인 2021.01.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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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마사히코 지음 |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364쪽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의 저자 기시 마사히코,
‘내가 아닌 나’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다

 

듣는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의 인터뷰집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으로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화제를 모은 기시 마사히코의 전작인 인터뷰집 『거리의 인생』이 출간되었다. 이 인터뷰집은 저자의 주요 학문적 방법론인 구술 채록을 생생히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독특한 책을 틔워 낸 싹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 일본계 남미 출신 게이, 트랜스젠더, 섭식 장애인, 성 노동자(‘마사지 걸’)인 싱글맘, 노숙자 등과 나눈 인터뷰가 실려 있다. 저자와 그의 제자들이(두 편 인터뷰) 대면 또는 전화로 나눈 다섯 편의 인터뷰를 저자가 최소한의 편집을 거쳐 다듬은 내용이다.


이 책에서 인터뷰어들(저자와 그의 제자들)은 인터뷰 대상 인물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되 그들의 이야기에 함부로 개입하거나 정리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중한 태도로 인해 인터뷰 대상자들은 흔히 ‘소수자’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임에도 선정적으로 대상화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놓는다. 저자가 평소에 전혀 알지 못하던 인물과 인터뷰를 나눈 경우도 있지만, 오랜 기간 친밀한 관계(라포르rapport)에 있었던 인물들과 나눈 인터뷰에서도 적정한 선을 넘는다 싶은 경우 바로 물러서 이런 태도와 거리는 잘 유지된다. 이러한 미덕은 ‘소수자’인 이들의 인생사를 나와 무관한 사람들의 것으로 주변화하지 않고 ‘내가 아닌 나’의 평범한 인생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게 한다.

 

외국인 게이, 트랜스젠더, 섭식 장애인, ‘마사지 걸’ 싱글맘, 노숙자가 들려주는 생활사


이 책에 나오는 다섯 사람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상성에서 다소 벗어난 이들이다. 남미 어느 국가 출신(가명으로 처리됨. 이 책에 나오는 인?지명 등 대부분의 고유명사는 가명)으로 일본계인 루이스는 청소년기에 일본에 온 이래 외국인으로서, 게이로서 ‘이중의 소수자’로 살아왔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일본에 와서 명문대 법학부에 입학해 차별받는 외국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고, 정규직 취업에 실패하여 파트타임 노동자로 살면서 겪은 노동 현실을 들려주기도 한다. 자신의 조국과 일본 사회의 부조리, 자신의 정체성이 지닌 한계를 모두 체감한 그는 일본의 다수자라면 알기 어려운 예리한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 트랜스젠더인 리카는 성소수자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무너뜨린다. 일찌감치 자신의 성정체성과 재능을 깨닫고 ‘뉴하프’(여성의 모습으로 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로 살아가기로 결심하여 이를 실행에 옮긴 적극적인 소수자다. 그가 보여 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연애에 대처하는 자세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뚜렷한 이유 없이 섭식 장애를 겪어 온 마유는 자신의 병증을 곰곰이 고찰하고 질병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 반대하는 논문을 쓰는 등 사회적 차별이나 편견에 맞서는 운동을 모색하는 확장된 관점을 갖게 된다. 거품 경제기 호황을 누리다가 몰락한 남편의 빚을 떠안고 세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인 요시노는 출장 마사지업(일종의 성 산업) 종사자다. 생활 보호 수급자인 그녀는 빚을 청산하고 업계에서 떠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수급에서 제외되자 다시 업계로 돌아오는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의 현실을 잘 보여 준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보통의 어머니로서의 모습과 성적 서비스의 양태에 따른 다양한 조어(造語)가 있을 만큼 세분화, 고도화된 일본 성 산업의 단면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출생 연도와 출생지, 본명조차 불명인 노숙자 니시나리 아저씨는 전쟁과 거품 경제, 지진 등 일본 사회의 변천과 함께 흘러온 자신의 인생 역정을 들려준다. 도박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아내에게 말도 없이 집을 나와 떠돌이 노동자로, 노숙자로 살아온 그의 이야기에는 변명과 허세, 회한, 불완전한 기억이 뒤죽박죽되어 있다. 노숙자임에도 삶의 질(매식, 커피, 담배 등)을 고집하고 돌봐 주는 이 없는 자신의 마지막을 걱정하는 보통의 노인이다. 신원 미상인 이 노숙자를 수소문한 저자에게 며칠 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읽는 이로 하여금 그의 인생을 좀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가장자리 인생’ 이야기, 가장 보통의 서사가 되다

저자는 우리의 인생, ‘나’라는 존재 역시 ‘단편’이라고 말한다. 여기 실린 개인의 생활사 역시 각자의 긴 인생에서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 전체에서 보면 단편적이더라도 각각의 서사는 생생하고 완결되어 있고, 세계 자체와 비슷한 의미와 무게와 폭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단편의 단편’을 될 수 있으면 그대로 기록하여 ‘인생의 모습에 가까운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 책에서 자신의 생활사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특출한 사람, 뛰어난 사람에 대비하면 보통 사람이며, 사회적 정상성의 범주에 대비하면 소수자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생각하고 싶은) 보통의 범주와 이들 ‘소수자’의 범주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이 들려주는 각자의 어둠과 난관은 우리 모두가 맞서 싸우고 있는 각자의 무게와 질곡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본질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점, 선택이 가능한 경우라도 그 이유와 결과가 같지 않다는 점, 그럼에도 선택지 가운데 최선의 것을 혼자 선택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은 이들의 이야기를 평범하고도 위대한 서사로,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사회적인 서사로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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