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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_'일빙' 현실에서의 '웰빙'
생각하는 이야기_'일빙' 현실에서의 '웰빙'
  • 신중섭 강원대
  • 승인 2004.06.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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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많은 교수들은 평안하지 못하다. 지방 대학 교수는 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나이 50을 전후한 교수들은 특히 평안하지 못하다. 새로운 의욕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 변한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잘 따라주질 않고, 현실을 외면하고 살던 대로 적당히 세월아 가거라 하기에는 남은 기간이 너무 길다. 강의실에서 학생들과의 교감도 점점 떨어지고, 배우고 가르치는 재미도 예전과 같지 않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공자님의 말씀 앞에서 어색하게 서성거릴 뿐이다.

젊었을 때는 연공서열에 따르고 나이 들고 나니 성과급으로 변화하는 세태도 마땅치 않다. 연공서열에 따른 대우든 성과에 따른 대우든 현상유지만 되면 다행이겠는데, 그런 보장도 없다. 학생 부족으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속출하면서 인기 없는 인문?사회과학 관련 학과는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현실 앞에 망연할 따름이다. 아직도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고 강사 신분으로 대학을 맴돌고 있는 친구나 후배들을 생각하면 이 망연함은 가중된다.

그러나 교문 밖은 딴 세상이다. 세상에선 웰빙(well-being)바람이 한창이다.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데 웰빙이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일빙(ill-being)한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 웰빙이 뜨고 있는 것일까. 웰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다만 광고에서만 빛나고 있는 것일까.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공존하는 것이 현대 문화의 특징이라면 상극적인 두 현상을 모순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웰빙과 일빙은 사회 경제적 상태와 무관한 개인의 마음의 상태여서 모든 사람들이 웰빙과 일빙을 오락가락할 수도 있고, 웰빙한 사람과 일빙한 사람이 공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43개 사회의 문화적?경제적?정치적 변화를 실증적으로 조사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기 상태에 있을 때와 안전 상태에 있을 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고 한다. 위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강한 지도자와 질서를 필요로 하고, 외국에 대해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반면에 안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권위를 경시하고, 자기표현과 참여를 높이 평가하고 외국에 대해 개방적이고 새로운 것을 참신한 자극으로 적극 수용한다.

위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 성장을 우선시하고 강한 경제적 성취동기를 갖는다. 반면 안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관적인 웰빙을 추구한다. 나아가 위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가정을 이뤄 자기를 복제하는 반면, 안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면서 개성을 중시한다.

위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생존가치’는 농업사회와 초기 산업사회의 특징이며, ‘웰빙가치’는 선진 산업사회의 특징이라고 한다. 농업사회와 초기 산업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생존가치’를 강조했다. 생존이 불안하면 자기를 지켜줄 강력한 지도자를 찾게 되고 확고한 질서가 자신의 안정을 보장해 준다고 믿게 된다. 흥미로운 일이나 의미 있는 일보다는 자신의 수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 양부모가 있는 가정을 중시하고 자식을 많이 낳아 노후를 보장받으려 한다.

1960~1970년대 우리 사회를 주도한 것은 ‘웰빙가치’가 아니라 ‘생존가치’였다. ‘웰빙가치’에 대한 요구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변했다. 적어도 1950년대에 이 땅에 태어난 세대들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동시에 살면서 가난의 쓴맛과 불편을 경험해 ‘생존가치’의 중요성을 몸소 깨달아 알고 있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런 것들은 글이나 영상으로 간접 체험할 뿐이다. 그들에게 ‘생존가치’에 매몰된 세대는 인생의 즐거움을 망각한 어리석은 세대거나 낡은 것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로 보인다.

‘웰빙가치’를 추종하는 젊은 세대들에겐 ‘생존가치’에 대한 강조는 귀찮은 잔소리일 뿐이다. 이제 젊은이들은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고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들의 주도적인 가치를 바꾸지는 못한다. 더 이상 경제적 동기나 종족 보존에 사로잡혀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할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인생을 값지게 보내겠다는 그들의 꿈을 탓할 수는 없다. 웰빙이 일빙보다는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한 세상인데 대학에서는 역풍이 불고 있다. 대학 당국과 교수들은 ‘생존가치’에 매달려 자신들이 살길을 찾아야 한다. 힘 있는 자의 ‘개혁’ 명분에 밀려 힘없는 자는 ‘自救策’을 강구해야 한다. 대학은 ‘생존가치’를 신봉하는 외딴 섬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대학 밖의 웰빙을 찾아 이 섬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섬 속에 섬으로 남아 웰빙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일빙 속에서 웰빙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연마해야 하는 것일까.

신중섭 / 강원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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