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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의 밤
프롤레타리아의 밤
  • 교수신문
  • 승인 2021.01.2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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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지음 | 안준범 옮김 | 문학동네 | 620쪽

해방의 주체, 이론적 대상으로서의

‘인민’이 지닌 지배적 형상을 비튼

랑시에르의 문제작

 

프롤레타리아의 밤. 이 제목에서는 그 어떤 메타포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는 공장 노예의 슬픔을, 누추한 노동자 주택의 비위생을, 통제되지 않는 착취에 의해 고갈된 신체의 비참을 상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이 책의 인물들의 시선과 말, 꿈과 이성을 통해서만 문제될 것이다. (9쪽)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은 자크 랑시에르의 국가박사학위논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68혁명을 경유하며 알튀세르와의 관계를 논쟁적으로 청산한 뒤 랑시에르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첨예화한 저작이자 대문자적 주체와 그 표상에 이의를 제기한 문제작이다. 랑시에르가 문서고에서 1830~50년대 프랑스 노동자들의 저널과 일기, 편지들을 독해하며 써내려간 이 책은 노동자들의 문화사나 사회사가 아니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노동자의 말하기가 이들의 노동 조건을 반영한다거나 어떤 동질적인 문화를 표현한다고 추론하는 역사학적 방법론에 대한 비판, 노동자의 과학임을 자처했던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포함한 학문적 사유에 내재적인 분할 논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책은 전체 3부로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들로부터 탄생한 생시몽주의 노동자 저널들과 거기에서 펼쳐진 생각과 사상들에 대한 독해에서 시작해(1부),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지속적으로 발전해간 생시몽주의 실천들과 논쟁들을 다루고(2부), 마지막으로 이집트와 미국에서 시도된 이카리아 공동체 건설의 실패와 그에 따른 환멸을 다루면서(3부) 끝난다. 이는 프랑스 사회주의운동 초기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통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담론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기획이 아니다. 랑시에르는 시인이자 목수인 고니, 양재사 데지레 베레, 내의 제조공 잔 드루앵, 계량 용기 제조업자 피에르 뱅사르 같은 인물들이 내는 수다스럽고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주목하며 지배담론의 질서 안에서 ‘자리를 벗어난 말하기’라는 파열의 형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를 짓고 노래하는 고게트에서의 밤의 사회화, 보편적 인류와 형이상학을 논하며 느리게 산책하는 ‘시대착오적’ 프롤레타리아들, 전산업적인 도시 군중과 후진적인 수공업 노동자와 프티부르주아들의 모순과 역설과 뒤엉킴. 요컨대 이 책은 사유하는 자와 생산하는 자의 플라톤적인 분할을 가로지르는 지성적 평등에 대한 논증이자 지배적인 ‘질서의 철학’에 대한 ‘논리적 반역’이다.

 

타자들의 언어를 전유한 밤의 노동자들과

침묵하는 인민에 대한 근대적 매혹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실존과 투쟁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의 비밀이다. “상품의 비밀”이 아니고. 상품에 낮처럼 밝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관건은 낮이 아니라 밤이요, 타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의 “비애”요, 모든 현실적 슬픔을 포함하는 창안된 슬픔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을 집어삼키려드는 것”에 맞서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착취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와는 다른 것을 향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음을 드러내주는 자아 인식이다. 이러한 자아 드러냄은 타자들, 지식인들, 이 지식인들이 나중에 좋은 부르주아든 나쁜 부르주아든 구별 않고 여하튼 아무 관련도 없길 원한다고 말하게 될 우리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반복하고 있는 바 부르주아들의 비밀로의 우회를 거친다. (본문 41~42쪽)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으로부터 노동자 말하기를 일정한 존재 양식이나 어떤 문화(생활사)로 귀착시키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되는 현실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 이 노동자의 말하기를 일종의 노동자적 집단 형체 안에 가두면서 사실상 거기서 문제가 되었던 유형의 진리를 없애버렸다는 것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적이고 자연화하는 기능을 갖는 서사를 채택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문제의식을 획득한다. 말하자면 어떤 자리에서 어떤 형체를 끌어내고, 이 형체에서 어떤 목소리를 끌어내는 서사를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서사 양식은 말하기를 행하는 이들을 ‘그들 자신의’ 세계 안에 머물도록 배치하며, 그들의 위상을 ‘인가’한다. 그러나 담론의 질서 안에서 노동자의 존재 양식에 합당하다고 간주되어 할당된 말을 거부하고 이런 말하기의 자리에서 벗어나면서 저 질서를 전복했던 ‘밤의 노동자들’이 타자들(부르주아, 학자, 시인)의 언어를 전유했듯, 정작 문제는 이른바 부당한 담론들이 짜인 망의 구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일정한 정체성을, 형체와 말 사이의 일정한 동일성의 관계를 깨뜨리는 담론들. 결국, 이런 말하기의 세계에서 인가받지 못한 것이자 흠이 있는 것이라는 그 특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경험들의 모호함과 비결정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에게 다른 식의 서술이 필요했다.

그가 이후 『역사의 이름들』을 통해 ‘지식의 시학’으로 명명하는 언술로써 주목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이단적 역사의 비동시대성이자, 그 단절의 복합성이다. 요컨대 철학과 역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밤의 말들’을 노동자 집단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동일성의 표현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반역적 노동자들의 집단적 상징화가 일상적인 노동의 현실과 여기서 비롯하는 노동자적 동일성과의 단절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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