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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경제학계에 던진 질문들
한국 정치경제학계에 던진 질문들
  • 이병천 강원대
  • 승인 2004.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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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 : '정치경제학의 개방과 현대 자본주의론의 재구축'을 보고

이병천 / 강원대·경제학

맑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제국주의론' 이후 자본주의는 크게 변화했다. 독점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론은 오래 전에 매력을 잃었다. 여전히 단순 노동착취론과 자본주의 경향 법칙에 의존하거나, 역사적 자본주의의 변모를 외면하고 추상적 원리론을 전가의 보도로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메아리는 약하다. 단계론의 시각이든 유형론의 시각이든 이제 자본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자본주의는 아니다. 역사적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자유민주적 자본주의, 사회민주적 자본주의, 그리고 동아시아 개발 자본주의 등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비합리성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보다 더 못한 사회주의가 실존할 수 있다는 사실, 나아가 사회주의 또한 이윤 동기와는 다르지만 경제적 합리성과 성장을 물신화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유사한 소외된 시스템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학습했다.

개방적 이종교배의 정치경제학 구축하기

미국패권 하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는, 주로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간의 경쟁,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의 길을 둘러싸고 다투고 있다. 새로운 현대 자본주의론은 소비, 금융, 정보, 문화, 그리고 생태 문제를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재구축되고 있다. 기술, 소유 및 생산 관계와 더불어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 시장-제도-국가의 배열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경제, 정치, 윤리의 상호 관계, 그리고 세계, 국가, 지역의 상호 관계가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규제 완화와 유연화의 지상명령, 인간과 세계의 전반적 상품화와 사물화의 경향, 삶의 욕구와 효율-성장의 주객이 전도된 상황, 범지구적 생태위기와 자멸적, 지속불가능한 위험사회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발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를 묻고 있다.

누에고치 같이 안으로만 감아 도는 닫힌 정치경제학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현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이종 교배의 개방에서 살길을 찾아 나섰다. 김형기 교수가 이끄는 경북대 새 정치경제학 그룹은 닫힌 누에고치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개방적 이종 교배의 정치경제학을 구축하는 한국적 길에서 뚜렷한 일각을 차지한다. 이 그룹은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분야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필자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참석해 토론하고 배울 기회를 가졌다.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 정치경제학 그룹은 열심히 하는 모범으로 정평이 나 있다. 관심의 다양성과 이질적인 다양한 견해의 공존이라는 점에서도 이 그룹은 특징적이다. 1차 발표회도 그랬듯이 이번 발표회도 이런 특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금융주도 축적체제에 대한 분석, 글로벌화 정보화 시대의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글과 더불어, 이와 거의 대척관계에 있는 자율주의 및 유목주의에 대한 글이 발표됐고, 지역 교환경제, 생태 모순, 가부장적 자본주의 등을 주제로 한 글까지 발표됐다. 그러나 발표회의 무게는 금융주도 축적체제론과 자본주의 다양성론에 많이 실려 있었고 필자의 시선도 주로 그 쪽으로 가게 된다.

유럽식 사회적 시장경제의 가능성

금융주도 축적체제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와 동학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조절이론 측의 아글리에타와 브와예, 그리고 셰네에 의해 개진된 바 있다. 이 주제는 앞서 제도경제연구회의 작업과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 紙上에서도 주목된 바 있지만, 이번 발표회에서는 아글리에타 대 셰네의 견해 대립을 중심으로 이 축적체제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둘러싼 논쟁과 쟁점이 한층 일목요연하게 정리됐고, 연구상의 공백 지점도 짚어졌다(조복현). 서익진은 금융주도 축적체제의 내적 모순을 체제의 불안정성, 불평등성의 심화 그리고 성장 체제로서의 지속 불가능성의 세 가지로 명확히 정리했다. 발표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셰네에 가까웠다. 이 같은 견해는 의도와는 관계없이 '제국의 몰락'을 주장하는 월러스틴의 견해와 친화성을 가질 수 있다. 토론에서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금융 거품적 현상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이며, 실물과 금융, 산업자본과 금융 자본의 관계에 대해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조영철, 박종현).

'글로벌화 정보화 시대의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주제로 한 김형기 교수의 논문은 경북대 새 정치경제학이 가는 길을 잘 보여주는 대표격 논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발전 모델의 다양성의 분석 방법으로서 미시-거시 연관의 분석틀과 제도 및 문화의 다양성이 갖는 중요성을 내세웠다. 그런 틀 위에서 세계화 속의 지식 주도 신경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유럽식 사회적 시장경제의 길이 존재함을 주장했다. 이 같은 논지는 한국경제의 대안적 활로를 모색하는 관심으로 이어진다. 토론자였던 필자는 기본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유럽 사회적 시장 신경제 길에서 핵심사안이 돼온 유연안정성(flexicurity) 대안이 빠졌다는 것, 자본주의 다양성론에서 동아시아적 시각이 빈곤하고 세계화 충격에 대응할 국내조절기제 구축의 절실한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발표회를 보고 듣고 나서 사람들은 필경 더 많은 주문을 할 것이다. 새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데, 진정 패러다임 전환이 있는가. 제한된 이론인 정치경제학의 틀 속에 무리하게 많은 것을 담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현대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막상 단계론 없는 유형론에 그친 것은 아닌가. 세계체제 수준의 모순에 대한 분석이 미흡하지 않는가. 과연 수입 이론의 정리를 넘어선 새로운 진전과 창의가 있는가. 그렇지만 이 요구는 경북대를 넘어 한국 정치 경제학계 전체로 향해야 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국경제사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과 한국의 경험', '전환시대의 경제개혁과 한국의 새발전모델' 등의 논문이 있고, '위기 그리고 대전환', '한국경제, 재생의 길은 있는가' 등의 공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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