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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음의 불편함
태어났음의 불편함
  • 교수신문
  • 승인 2021.01.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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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 지음 | 김정란 옮김 | 현암사 | 360쪽

 

시오랑은 진정한 역량을 지닌 오늘날의 저술가들 중에 가장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이다(수전 손택).

 

1973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유럽 독서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열렬한 마니아층이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시대를 이어가며 읽혔던 에밀 시오랑의 대표작 『태어났음의 불편함(De l’inconvenient d’etre ne)』이 김정란 시인의 번역으로 새로이 출간되었다. 『내 생일날의 고독』,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등의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이전의 판본과는 다르게 원래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에서 번역자인 김정란 시인은 에밀 시오랑의 독특한 프랑스어 구사법과 우리말과의 간극을 메우며 또는 드러내면서, 세상에 ‘던져진’ 우리 존재에 대한 그의 육성에 가까운 아포리즘적 절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죽음에 처절히 맞서 직면했던 전투적 이상주의자 에밀 시오랑

 

시오랑은 극단적인 비관주의자다. 그에 의하면, 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한 생을 견디는 것뿐이다. 태어남은 불편함이다. 태어남의 불편함, 태어남이라는 모욕.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시오랑은 우리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고, 그 재난을 잊기 위해 분투하는 것으로 여긴다.

시오랑의 이러한 관점은 생의 조건을 생사고락(生死苦樂)으로 보고, 그중에서 ‘태어남’의 고통을 맨 앞에 두었던 부처의 관점과 일치한다. 그러나 시오랑이 부처의 제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실존주의적이다. 그는 생의 모든 고통을 일률적으로 지워버리는 열반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생의 문제에 성실하게 매달린다. 열반이라는 비전은 생의 구체적 고통을 너무나 형이상학적으로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은 그 철저한, 절대적인, 악마적인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 또는 소극적으로는,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나는 나를 견딥니다.

 

생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인간이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보는 시오랑은,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진보했지만 그 진보는 구원의 열쇠가 아니라 파멸의 경사로로 여긴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시련은 벌이 아니라 축복이다. 영적 소명을 가진 자는 시련 안에서, 투쟁의 힘겨움 안에서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아무 희망도 없이 싸움은 지속되지만, 아무 희망도 없기 때문에 더더욱 영광스럽게. 따라서 시오랑의 사유체계 안에서 ‘승리’ 또는 ‘성공’이란 아무 의미도 없다. 성공은 존재를 타락시킬 뿐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실패는 예정된 것이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며,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無)로, 태어남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유일하고 영광스러운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이 20세기 철학자 시오랑이 중세기의 ‘사막의 수행자’들을 실존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신을 찾아 인간세계를 떠나 사막으로 갔던 수행자들이 신을 만났다는 객관적 징표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한 것은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추구 안에서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오랑에게 이상(理想)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오랑은 사막에 가지 않는다, 또는 가지 못한다. 그는 못 가기도 하고, 갈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가 머물러 있는 대도시는 이미 사막이다. 모든 것은 화려한 삭막함이라는 모래에 덮여 있다. 그러므로 시오랑의 수도(修道)는 기둥 없이 기둥에 올라가 수행하는 수도자의 고행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의 절망은 뒤집어 읽으면, 그가 생에 대한 엄청나게 높은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는 그 비전을 위해 자신을 부수며 끝까지 싸운다. 그 싸움이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 투쟁의 이상주의는 더욱 극적으로 확인된다. 시오랑에게 좌절은 절망의 계기가 아니라, 각성의 계기이다. 깨달음, 번개처럼 후려치는 좌절은 각성한 인간을 해방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확실성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시오랑의 어두운 글은 우리에게 오히려 견뎌낼 힘을 준다. 그의 글은 달콤한 거짓 위안이 아니기 때문에 생의 무참한 무의미함 앞에서 그것을 직시하고 감당하며 이겨낼 힘을 주는 것이다.

 

시오랑과 프랑스어

시오랑을 시오랑으로 만들어준 것은 프랑스어다. 모국어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업하면서 시오랑의 문체는 완전히 바뀐다. 그는 자신의 프랑스어 사용을 ‘제2의 탄생’이라고 불렀다. 사유의 내용이나 철학적 추구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으나 문체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시오랑은 그것에 대해 “내가 쓰는 것 안에 변화는 없다. 나의 첫 번째 책은 이미 암묵적으로, 내가 그 후에 말한 것을 모두 담고 있다. 문체만이 다를 뿐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외국어 작업의 어려움 때문에 짧은 문장을 선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차 그 아포리즘적인 글쓰기는 그의 사유 근저에 있는 극소주의(지극히 절제된 언어 표현. 언어의 자기만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극소 지향의 문장)와 잘 어울리게 된다. 잘 쓰려는 욕망, 또는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글쓰기였다. 그의 프랑스어 문체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발휘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약간 뻑뻑하게 느껴지는 문장. 그러나 그 사이에서 발랄하게 움직이는 유머와 냉소, 아포리즘. 끝까지 밀어붙인 비관주의. 그러나 그 자체로 역설적으로 빛나는 비관주의. 이성, 정념, 금욕주의, 명징함과 패러독스. 시오랑에게 프랑스어 사용은 ‘치유’와 같은 것이었다. 강요된 불편함. 그러나 그 덕택에 잘라내게 된 수사학적 욕망. 그래서 그는 “강압복이 미친 사람을 가라앉혀주듯이 프랑스어는 나를 가라앉혀주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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