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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차이 속에 반복된다
사유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차이 속에 반복된다
  • 박성수 한국해양대
  • 승인 2004.05.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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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민음사 刊, 2004, 708쪽)

▲ © yes24
박성수 / 한국해양대·철학

이 책의 들뢰즈 연보에 나오듯이 이 책을 끝으로 들뢰즈의 철학사 연구의 시기는 끝난다. 그 말은 거꾸로 이런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시대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거나,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 답변을 직접적으로 모색하거나, 좀더 좁혀진 장르에 집중하는 일 등을 위해서 일정한 과도함이 수반됐던 시기가 열리기 이전에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이다. 주장의 과도함이든 수사의 과도함이든, 그 과도함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소위 '전통적인'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차이와 반복'이며, 그래서 전통적인 철학과의 상당한 연속성에서 문제와 그 해결을 위한 논의의 전개를 살펴 볼 수 있는, 들뢰즈 저작의 중간 마무리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 저작의 중간 마무리 지점

이 책의 주된 목표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유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차이를 모든 것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근본성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차이는 개념으로 포섭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념이 갖는 보편성은 차이를, 차이가 아닌 것으로 바꿔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차이는 우리에게 나타나야 하고 우리의 의식에 대해 출현해야 한다. 그 나타남의 문제는 반복으로 접근된다. 여기서 반복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함의시키는 것과는 달리, 같은 것의 되풀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말했듯이 반복은 차이의 출현을 말한다.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차이, 개념 없는 차이는 반복의 형상으로 출현한다. 들뢰즈가 프로이트를 통해서 전개시키듯이, 정신분석에서의 반복이 가장 전형적인 경우다. 프로이트의 경우 욕구가 의식적인 의미세계에 진입하지 못할 때에 그것은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그것은 의식적인 개념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출현하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는 억압됐기에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근본적으로 차이의 출현이기 때문에 억압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차이 그 자체, 다시 말해서 즉자적 차이는 대자적 반복 또는 우리에 대한 반복으로 나타나고, 들뢰즈는 이 두 개념을 통해서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유를 전개시킨다.


동일성, 또는 불변적 고정성을 대표하는 것이 들뢰즈에게 재현이고 그것의 궁극적 구현이 플라톤주의인 이상 이 책은 반플라톤주의 또는 재현비판이라는 들뢰즈의 평생의 작업에 할당돼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들뢰즈가 일정한 반향을 지속적으로 얻고 있다면, 그 이유는 들뢰즈의 재현비판이 쓸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두 가지의 들뢰즈 효과가 존재한다. 하나는 고정성, 불변성, 권위, 척도, 표준 등에 대한 전면적 탈신화화의 작업에 들뢰즈의 용어와 수사법이 활발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뒤집기로서, 즉 기존에 중시되던 개념과 논리에 대한 전면적인 뒤집기에 들뢰즈의 틀이 또한 사용된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 책의 출간이 특히 관심거리가 되는 까닭은, 이 두 효과 각각에 대해서 이 책이 전혀 다르게 작용하리라는 점 때문이다. 첫 번째 효과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보다 긍정적으로 강화하는 작용을 수행한다. 그것은 보다 세밀하고 탐색적인 들뢰즈의 논의를 통해서 상호관련성의 인식이 얻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전통적인 철학에 대해 원활하게 연결될 수 있는 풍부한 논의를 제공하는 한 그렇다.

한국의 약간 엉뚱한 들뢰즈 수용

그러나 두 번째의 효과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에게 일종의 구호처럼 스며들어 있는 반플라톤주의 또는 재현비판은 실제로 약간은 엉뚱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플라톤주의라는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플라톤주의를 극복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다시 말해서 뒤집어 놓은 모래시계가 이전의 시계와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현재 유행하는 두 번째 효과는 단지 위아래만 바꿔 놓은 또하나의 이원론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들뢰즈가 말하고 있듯이 재현이 이원론에 바탕을 두는 것이라면, 여전히 재현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효과가 나타난 것은 재현이 몇 가지 논리나 대체개념을 통해서 간단히 치워버릴 수 없는 것으로서의 현실이기 때문이며, 또 들뢰즈의 '균열', '탈주' 등의 개념 등이 만능의 도구처럼 심하게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칙적 인식 전반에 대한 거부나 혐오 또는 무시가 마치 반플라톤주의의 내용이라는 투의 생각은 결국은 그러한 인식에 반하는 것을 또 하나의 진정한 존재나 본질로서 법칙이 차지하던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에 불과하다.


어차피 이 책을 구한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나중에 다시 읽어보기로' 결정을 하고 책을 치우게 되겠지만, 본격적으로 읽을 거라면, 시간의 세 가지 (수동적) 종합 부분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들뢰즈가 과거, 잠재성 등 들뢰즈 사상을 특징짓는 '공식적'인 용어로 가득 차 있는 두 번째 종합을 불충분한 것으로 보고, 세 번째 종합으로 넘어갔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종합에 머문다면 또 하나의 플라톤주의에 그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전면적으로 상투화되고 있는 '균열' 등의 용어가 실제로는, 이원론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변증법적인 매개개념(들뢰즈가 그렇게도 명시적으로 거부하긴 했지만)의 특성도 갖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차이와 반복'의 출간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고려대에서 '미적 판단력 비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화와 충격', '자연과학의 혁명과 인간의 개념', '들뢰즈의 영화철학' 등의 논문이 있고, '들뢰즈', '영화·이미지·이론', '디지털 영화의 미학' 등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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