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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망각, 혹은 책에 관한 기억
갈릴레오의 망각, 혹은 책에 관한 기억
  • 교수신문
  • 승인 2020.12.2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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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차섭 지음 | 길 | 304쪽

 

간서치 역사학자의 문사철(文史哲) 분야 50편 인문 단평과 30편 서평

이 책은 30여 년 서양사 중에서도 마키아벨리를 중심으로 한 서양 근대사상사를 전공한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가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했던 인문 단평 50편과 서평 30편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하지만 흔히 잡문’(雜文)으로 일컬어지는 에세이 성격의 글들이지만, 저자는 분명한 집필 의도를 갖고 짧은 성격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에세이는 한때 수필류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잡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잡문은 대체로 주류 장르에 속하지 않는 비주류의 글쓰기를 통칭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어떤 특정한 규준에 얽매이지 않는 잡문의 특성으로 보아 그 범위는 아주 넓지만 수준 높은 잡문은 현대 비평과도 닮았다. 최근 영어권에서는 인문학자의 논문도 종종 에세이라 부르는데, 이는 자유롭게 쓰되 비판적 전망을 놓치지 않는다는 새로운 글쓰기의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애초에 몽테뉴가 생각했던 잡문 식의 자유로움이 점점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에세이 내지 잡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자는 특유의 비판적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이나 세상의 이치, 그리고 문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비판적내용이 없는 잡문은 말 그대로 혼잣말하는 글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러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가 대단한 책벌레, 즉 간서치(看書癡)임을 알 수 있다. 직업상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주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 분야의 책까지 두루 섭렵하고 상당한 식견까지 밝히는 부분을 보면 독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유학 시절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버틀러 도서관에서 구하기 힘든 전공 도서를 입수하는 과정을 다룬 버틀러의 기억은 책을 대하는 그의 자세 또한 가감 없이 들여다 볼 수 있다. 담담한 어조로 내면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준 몽테뉴의 에세이와 그보다는 더 실제적이고 종종 신랄한 유머 감각까지 보여준 프랜시스 베이컨의 에세이가 글쓰기 방식의 한 전범(典範)을 보여준다면, 저자의 에세이 식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정치와 역사, 문화를 읽는 또 다른 비판적 감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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