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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동향] 슬라보예 지젝, 구설수 인가 논쟁의 신호탄인가
[해외학술동향] 슬라보예 지젝, 구설수 인가 논쟁의 신호탄인가
  • 이택광/영국통신원
  • 승인 200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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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한 문장 속에 숨겨진 진실

재기 넘치는 입담으로 난해하고 복잡한 것으로만 알려졌던 라깡의 이론을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 분석에 적용해서 화제를 모았던 슬라보예 지젝이 최근 영국학계에서 논쟁의 가운데로 부상하고 있다.
구 유고연방 출신이자 슬로베니아를 국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젝의 공식 직함은 류블야나(Ljubljana) 사회연구소 선임 연구원. 그러나 영어권에서 공식적인 그의 경력은 영국의 출판사 ‘베르소’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숭고적 객관’을 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보 에스 바(Wo es War)’ 시리즈의 기획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바야흐로 미국으로 그의 특출한 재담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삭제한 문장 속에 숨겨진 진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지젝이 최근 들어 표명하기 시작한 자신의 입장에서 시작되었다. 지젝은 지난 1997년에 한 정신분석학 저널과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지금 현재 긴급한 작업은 정통 라깡주의와 맑스주의를 서로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한편 지젝은 올해 미국의 비평이론 저널인 ‘신문학사’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선명하게 라깡주의적 태도를 드러내는데, 예를 들어 버틀러가 말한 라깡의 실재계가 역사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실재계란 비역사적인 측면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지젝의 태도가 영국의 맑스주의자들에게 모호한 정치적 입장의 변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지젝이 영국의 학계에 진출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대표적인 포스트맑스주의자 라클라우였는데, 지젝의 책에 대한 서문에서 그는 명백하게 포스트맑스주의적 입장으로서 지젝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전개된 양상은 더욱 지젝의 입장을 종잡을 수 없도록 했다. 도리어 지젝은 갈수록 포스트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 역설적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최근 ‘래디칼 필로소피’에 기고한 논문에서 숀 호머는 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이 논문은 유고공습에 대한 지젝의 입장이 얼마나 모호한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유고공습 직후 인터넷에 게재된 지젝의 글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이후에 지젝의 이 문제의 글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신좌파평론’에 실리게 되는데, 호머는 지젝이 수정을 위해 삭제한 부분을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인터넷에 최초로 올려진 지젝의 원고는, “한 사람의 좌파로서, 공습에 찬성하느냐 찬성하지 않느냐는 딜레마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아직 공습은 ‘충분하지 않으며’ 또한 ‘너무 늦다.’” 호머의 지적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이 문장을 극적으로 라깡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하는 대목이다.

호머는 결국 이 문장을 통해 표명되는 지젝의 입장이 철저하게 라깡의 이론에 기대고 있음을 증명한다. 호머에 따르면 지젝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실재계의 인식불가능성인데, 왜냐하면 실재계란 정신적 트라우마로서 사회생활의 밑바닥을 이루는 끔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트라우마를 잊음으로써 인식을 얻게 되므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리얼리티를 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지젝의 논리대로 한다면 유고공습이 유고내전이라는 실재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가 없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바로 그 공습이라는 실재와 조우하는 것이 언제나 시간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에 ‘너무 늦게’ 되는 것이다.

유고공습에 모호한 태도 보여

물론 호머의 비판이 지젝의 말장난을 거론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실 유고공습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이 주는 문화적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호머의 지적은 실제로 이런 지젝의 태도가 그의 정치적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스스로 좌파라고 천명하는 것과 달리 지젝의 정치적 입장은 도리어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호머의 주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앞서 예로 든 문장만을 놓고 보더라도 지젝의 입장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평소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차이’에 대한 옹호를 또 다른 유럽중심주의라고 질타하면서 헤겔적 종합의 개념을 지지했던 그가 이제는 아예 실재란 조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하겠다. 지젝이 삭제한 문장에서 ‘탈구된 시간으로서의 기원’이라는 데리다의 주장을 읽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지젝에 대한 비판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 궁극적으로 헤겔적으로 해석된 라깡주의적 양식에 맑스주의를 접합시키려고 하는 시도에 집중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의 변증법에 내재된 결함은 헤겔적 시스템으로부터 초래하는 것이라는 피터 듀의 주장 역시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논의와 별도로 영국의 학계에서 지젝을 좋게 보지 않는 다른 이유는 그가 너무 ‘친미’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실제로 그의 출세작들이 모두 미국문화에 대한 분석이었다는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잘 아는 외국인’이라는 다소 비아냥거림이 섞인 지젝에 대한 논평은 단순한 영국인의 시기심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이택광/영국통신원 셰필드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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