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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생각하는 이야기
  • 박상진 경북대
  • 승인 2004.04.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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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가 열리는 고목나무 아래서

대학교수의 연구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용히 책이나 읽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축복받은 공간이라고 알려져 있어서다. 그러나 모두 지난날 이야기다. 경쟁적으로 논문과 보고서를 짜내야하고 각종 회의에 시달리며 학생 취업지도까지 연구실을 근거지로 이뤄진다. 요즘은 자기 전공의 사활이 걸린 구조조정이란 말도 걸핏하면 튀어 나오니 연구실의 의자가 말 그대로 가시방석이다. 웬만큼 신경 줄이 굵지 않고서야 흔한 말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마련, 잠시 모두 잊어버리고 어딘가 떠나고 싶어진다.

일제 말기에 쓴 박목월 선생의 ‘나그네’란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술 익은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괴나리 봇짐하나 둘러메고 남도 삼백리 길을 훌쩍 떠날 수 있었던 옛 선비들이 부럽다. 그러나 낭만시대의 꿈일 뿐, 지금은 어디를 가도 자동차 홍수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다. 핸들잡고 한참을 내달려야만 그나마 쉼터라고 찾아 갈 수 있는 처지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니 덩달아 싱싱 달려가 보지만 다다르는 곳이란 뻔하다. 이름난 절이 아니면 사람들의 발길에 반질반질 닳은 관광지, 대체로 여러 번 가 본 예의 곳에 또 가기 마련이다.

조용히 자신을 추스르고 일상의 찌꺼기를 털어낼 곳은 없는가. 나는 현미경으로 나무 세포를 들여다보는 목재조직학(wood anatomy)이라는 전공의 업이 지겨울 때, 달려가는 곳이 따로 있다. 바로 전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나무 찾아다니기다. 전공자의 조사와 연구를 위한 전용대상물이 아니라 쉼터로서 찾아 가기에도 부담이 전혀 없는 곳이다. 우리나라에는 218건의 식물천연기념물이 지정돼 있고 그중에 몇 아름씩 되는 고목나무는 141건이나 된다. 나라가 일등급 문화재로 지정해 특별보호를 하고 있으니, 비록 나무지만 민족의 역사가 서려있고 문화가 묻어있다. 전국에 거의 고루고루 흩어져 자라고 있어서 문화재청 홈피(www.ocp.go.kr)에서 찾아보면, 어느 도시에서라도 한 시간 이내에 천연기념물 고목과 만날 수 있다.

그의 자람 터는 대부분 한적한 시골마을 어귀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느긋함이 있는 곳, 도시의 번거로움을 털고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리에 그가 있다.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천년을 훌쩍 넘기는 ‘연륜’이 찾아간 우리들에게 경외마저 들게 한다. 그 앞에 서면 세월의 길이는 축지법으로 줄인 거리만큼이나 짧아진다. 우선 자연을 압도하듯 사방으로 펼쳐진 가지 뻗음으로 만들어지는 나무의 거대함은 그 자체로도 위엄이 있다. 하찮은 세상사에 매달리다 번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우리들을 넉넉하게 감싸줄 것만 같다.

뿐만 아니다. 어느 계절에 찾아가도 그는 항상 품위에 알맞은 옷을 입고 손님을 맞는다. 봄날 새싹이 돋을 때는 희망과 생동감으로 고목이라는 나이를 잊게 한다. 여름의 푸름을 거쳐 가을에 이르면 입은 옷의 색깔이 천태만상이다. 붉음과 노랑을 기본바탕으로 연출해 내는 단풍의 향연은 짙어가는 가을과 함께 날마다 색깔을 달리한다. 고목이라는 나이에 상관없이 변화에 대한 발 빠른 적응력은 우리들에게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이어지는 겨울의 나목은 삭막함 때문에 정체된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잿빛 줄기로만 나무를 보지 말고 큰 가지 작은 가지, 이어진 잔가지로 훑어 올라가 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섬세하게 뻗어나간 가녀린 가지 끝 부분들, 차가운 겨울 하늘과 대비되어 한없이 연약해 보여도 봄의 도약을 위한 기다림이 있다. 속에는 활력이 숨겨있는 것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늙은 고목의 진수는 외양만이 아니라 나이테에 간직한 그들의 내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자나무 밑은 마을의 알림방이고 의견교환의 장이다. 그래서 기나긴 세월 동안 마을지킴이로 살아온 나무에게는 원치 않아도 수많은 세상살이에 얽혀들기 마련이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그가 겪었던 사연들은 많을 것이다. 수백 년 시공을 건너 뛰어 나무와 사람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이테로 셈하여 하나씩 곱씹어 보는 것도 나무와의 만남을 한층 풍요롭게 한다.

큰 고목나무에는 대체로 전설이 들어있다.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박한 염원이 서려 있는가하면 권력자와의 인연을 간직한 역사 현장의 나무들도 있다. 마의태자가 지팡이를 꽂아 자랐다는 경기도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고승 지눌스님이 심은 절 지킴이 송광사의 쌍향수,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의 최후를 지켜본 삼척의 엄나무, 단종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영월의 관음송, 효자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전남 장흥의 효자송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갖가지 사연들은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다.

박상진 / 경북대 임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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