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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 雨鄕 박래현 展을 보고
미술비평_ 雨鄕 박래현 展을 보고
  • 김울림 미술평론가
  • 승인 2004.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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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넘나든 조형적 자유가 남긴 것들

20세기 한국화단을 이끈 대표적인 여류 화가로, 雲甫 김기창(1913-2001)을 헌신적으로 내조한 아내인 雨鄕 박래현(1920~1976)의 회고전은 다시 한번 우향의 작품세계와 그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간혹 페미니스트 미술사가의 경우 김기창의 영향 및 선후 관계에 관심을 갖고 시비거리를 삼기도 하지만, 박래현과 김기창은 누가 앞서고 영향을 미쳤는가는 실증적으로 밝혀낼 수도 없고, 밝힌다 해도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건 1950-60년대 이들 夫妻의 협력을 통해 이룩된 조형세계의 특질과 그 성취를 새겨보는 일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나타났지만 확실히 우향의 개성은 독보적이고 창조적이다. 처녀작 ‘거울앞의 여인’(1943)에서부터 1970년대 판화작품에 이르기까지 일본채색화, 큐비즘, 앵포르멜 등 다양한 외래양식을 수용하고 변용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순수한 적색과 흑색의 색면대비 및 예리한 여백구성, 기하학적 형태미에 반영된 팽팽한 긴장감과 도시적 감수성, 그리고 도자기, 엽전, 탈가면과 같은 민예적 모티프에 대한 향토적 관심은 모든 외래적 영향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향의 작품세계를 일관하는 기본원리며 개성이다. 특히 정적인 형태구성에서 간취되는 작가의 절제된 감정은 다소 과시적 경향을 보여주는 김기창의 역동적이고 분방한 필체와는 분명히 대조적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향 작품의 최절정은 엽전꾸러미를 모티프로 한 1960년대 ‘작품’시리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들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동양화의 매체, 즉 지?필?묵의 표현 특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 바탕을 둔 추상이란 점에서, 큐비즘에 대한 표피적 이해에 기반한 목가적 소재주의의 한계를 노정했던 1950년대 우향의 아카데믹한 구성작품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나 추상이라는 개념만으로 보면 1960년 묵림회가 시기적으로 앞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우향 스스로 1960년대 작업을 “동양화의 추상화”라는 키워드로 요약했다고 해서 이 개념만으로 이 시기 작품을 바라봐서는 우향의 독창성을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 작품들에서 분출되는 강렬한 에너지와 절제된 힘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작품’시리즈는 묵림회의 수묵추상 운동이나 서양화단의 앵포르멜 운동과 같은 동시대 추상운동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작품이 산출되기까지의 시련과 역경을 감안할 때 비로소 그 내면에 숨쉬고 있는 우향의 호흡과 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다고 본다. 청각장애인인 김기창에 대한 헌신적인 시중과 사남매 교육 등 과중한 가사부담 속에서 도저히 양립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자신의 작업에 대한 절망적 고독과 번민. 그리고 이를 끝내 이겨낸 위대한 여성의 예술정신이 있음을 간파할 때만이, 작품이 왜 이토록 생명에 충만한지, 소위 ‘氣韻生動’한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1960년대 ‘작품’시리즈는 나약한 모방을 통해 수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역경을 극복해 낸 강인한 예술정신을 통해서만 산출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인간승리의 위대한 기념비이자 표상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흔히 맷방석으로 잘못 불려지고 있지만, 엽전꾸러미는 도자기, 탈가면과 함께 김기창이 남산민족박물관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우향에게 익숙한 모티프로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 기반을 둔 현대적 한국미의 표상으로 재해석돼야 할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향에게 있어서 동?서양화의 구분이 무의미함은 확실하다. “동서양의 이분법 개념에 제한받지 않고 장르를 넘나들며 조형적 자유를 만끽했다”고 하는 평자의 비평은 그래서 너무나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우향의 이런 조형적 자유가 정작 무얼 남겼는가에 대해 이젠 진지하게 검토해야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애석하게 여겨지는 건 1960년대 엽전을 모티프로 한 ‘작품’시리즈를 통해서 이룩한 동양화적 표현기법과 추상정신의 합일이 1970년대 동양화적 새지평의 개척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우향은 동양화의 새지평을 확대하기보다는, 동양화에서 서구의 매체로 장르를 이동시킴으로써 1960년대의 성취를 스스로 저버렸던 것이다. “예민한 동양의 피부랄까 화선지에 스며가는 먹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색조의 변화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조용한 동양의 멋”(1965)이라던 우향은 왜 갑자기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1974)는 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부정했던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향의 동양화라는 매체에 대한 도구적 이해와 매체에 깃든 정신성에 대한 빈곤한 인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향에게 동양화는 무엇보다 이념과 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매체와 기법의 문제였으며, 전통 개념은 투철한 역사의식이 아니라 향토적 소재주의의 범주에 맴돌고 있었지 않았는가. 어떤 의미에서 우향은 매체에 있어선 동양화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서양화가였음이 간취된다. 지?필?묵이라는 전통 매체를 서구 모더니즘의 표현기법으로 사용한 게 그렇다. 이런 우향의 성향을 “동?서양의 미학을 아울렀다”’고 찬미하는 건 물론 평자의 자유겠으나, ‘동양화의 세계화’로까지 확대해석하는 건 재고해야 할 것이다. 가야금으로 비발디의 ‘四季’를 연주하는 것이 국악의 세계화가 아니듯이 말이다.

동서양 이분법론에 기초한 국수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향이 좀더 오fot동안 생존해 작품활동을 했더라면, 서구 모더니즘의 수용을 넘어서는 성취를 보여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박서보나 이종상이 성취한 그 세계를 박래현도 충분히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인 감각과 조형의식은 벌써부터 양화에서 이뤄지는 수법이 아닌가”라는 이봉상의 비평(1959)은 우향에게 보다는 오늘의 동양화가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문제는 매체가 아니라 정신이며 소재주의를 딛고  주제의식으로 승화하는 첩경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김울림 / 미술비평가

필자는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다. 최근 발표한 논문으로는 ‘청조 금석고증학과 소동파상’, ‘조희룡의 유배시기 회화세계’, ‘고려중기화국의 도석화풍과 인종시책’, ‘고려중기화국의 도석화풍과 인종시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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