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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봄 숲 냄새를 맡는 즐거움
생각하는 이야기: 봄 숲 냄새를 맡는 즐거움
  • 전영우 국민대
  • 승인 2004.04.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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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한껏 움츠려 있던 숲의 식솔들이 기지개를 폅니다. 풀잎은 풀잎대로,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바쁜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숲 바닥에서 뿜어 나오는 풀내가 싱그럽고 흙내가 구수하기까지 합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대지가 호흡을 시작한 셈입니다. 대지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숲의 식솔들이 가진 생명력은 놀랍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꽃을 피우고, 잎을 키우고, 향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명지바람 솔밭에서 온몸을 휘감는...

신록을 간질이는 명지바람이 솔밭을 지나갑니다. 보드랍고 화창한 봄바람에 따라 솔밭에서 송홧가루가 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 청명한 봄 하늘로 피어오른 송홧가루 구름의 비상도 잠시, 어느 틈에 우리 머리 위로 연두색 안개가 되어 내려앉습니다. 송홧가루가 내뿜는 기분 좋은 방향성 향기가 코끝을 스쳐지나갑니다. 옅은 송진냄새가 온몸을 휘감습니다. 솔잎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속에 찌든 영혼까지도 청신한 기운으로 씻어지는 듯 합니다. 그래서 송홧가루가 휘날리는 솔밭의 향기는 철따라 다른 숲의 모습을 즐겨 찾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소나무가 송홧가루를 흩날리면서 신비로운 향기를 창공으로 내뿜고 있을 때, 아까시나무는 계절의 여왕다운 진한 향기를 준비합니다.

전나무의 송홧가루는 솔숲의 송홧가루보다 조금 이른 때에 만들어집니다. 이 때의 전나무 숲이 만들어내는 향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만 조금 더 진한 향기는 올 봄에 새로 키운 마디에서 돋아난 연녹색의 바늘잎에서 뿜어 나옵니다. 꺾어진 가지와 떨어진 솔방울에서, 흩날리는 송홧가루에서, 그리고 새잎에서 뿜어 나오는 전나무 숲의 독특한 향기는 테르펜 성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탄소와 수소가 결합된 테르펜은 식물체의 조직에 들어 있는 정유성분입니다. 향기로운 휘발성 기름이 바로 테르펜입니다.

전나무나 소나무 숲의 냄새를 독특한 향기, 향기로운 휘발성 성분, 테르펜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봄 숲에서 맡을 수 있는 다양한 냄새를 짧은 어휘로 표현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수만 가지 색조를 띤 봄 숲의 화사함이나 온갖 소리를 만들어내는 겨울 숲의 비장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그러나 봄 숲이 내뿜는 부드럽고 신선한 냄새를 짧은 어휘력으로 표현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 감별할 수 있는 냄새의 종류는 40만 가지나 된답니다. 그러나 제각각의 냄새에 적합한 단어를 쉬 찾을 수 없습니다. 숲의 향기를 생각하면 저는 그래서 언제나 미안합니다. 제각기 다른 숲이 만들어내는 감미롭고 청신한 그 다양한 냄새를 표현할 수 없는 무딘 붓끝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마도 청각이나 미각 또는 시각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후각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리나 맛이나 색에 대한 언어표현과는 달리 냄새에 대한 언어구사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린네란 사람은 식물의 계통을 분류하여 식물마다 고유한 이름을 부여한 사람입니다. 그는 식물이 내뿜는 향의 느낌을 유쾌한 순서에 따라 여섯 가지로 나눴답니다. 방향성 냄새, 향기로운 냄새(향수), 머스크 향과 같은 사향 냄새, 마늘의 짜릿한 냄새, 땀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그리고 역겨운 냄새로 말입니다.

숲이 내는 향기에도 품격이 있어

소나무 숲과 전나무 숲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는 유쾌한 순서로 따졌을 때 가장 상위에 자리 잡고 있는 방향성 냄새입니다. 그리고 아까시나무 꽃이나 수수꽃다리 꽃의 향은 방향성 냄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유쾌함의 정도가 상위권에 속하는 향기로운 냄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산사나무나 밤나무가 꽃을 피울 무렵에는 머스크향과 같은 달콤하면서도 야릇한 냄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만 산사나무의 꽃에서는 여성의 은밀한 냄새가, 밤나무 꽃에서는 남성의 정자 냄새가 풍기기 때문입니다.

아까시나무 숲에서 진한 향기가 흩날리기 시작하면 봄 숲이 만들어내던 오묘하고 신비로운 향기의 잔치는 파장에 이릅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은 아까시나무 꽃향기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지도 모릅니다. 송홧가루를 털어 낸 솔숲이 내뿜는 송진 가득한 냄새는 물론이고, 건강한 바늘잎에서 뿜어 나오는 전나무 숲의 방향성 냄새도 차츰 서려집니다. 그리고 참나무 숲이나 그밖에 넓은잎나무들이 모여 사는 숲 속을 지나는 바람 속에서 자연의 순한 체취를 느끼는 일도 잠시, 이제는 그저 밋밋한 풋내만 코끝을 스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앞에는 숲 향기의 제전이 곧 펼쳐질 것입니다. 자연이 만든 향기를 즐기고자 어디부터 먼저 나설참입니까. 전나무 숲입니까 아니면 소나무 숲입니까. 아까시나무가 꽃을 피울 때까지 기다리시겠다고요. 어느 곳을 선택하든 여러분의 자유입니다만, 숲이 내는 향기에도 품격이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전영우/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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