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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美를 논하다⑤_자생성의 미학
우리시대의 美를 논하다⑤_자생성의 미학
  • 윤범모 경원대
  • 승인 2004.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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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주의 넘어 '지금 여기'의 시대정신으로

편집자주: '자생성'은 우리 미학의 영원한 화두다. 그것은 서구 미학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한국적인 것을 개발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런 식의 정체성 논의에 걸쳐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하나로 귀납될 수 없는 것이 자생성 미학 논의가 갖는 특징이다. 필자로 나선 윤범모 교수는 '소재주의'를 넘어 현실문제를 고민하는 시대정신을 확보함으로써 자생성이 구현된다고 강조한다. 여타 예술 분야들에서도 자생성 탐색은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각 장르마다 개념규정에서 소소한 차이가 있다. 연극, 음악, 영화, 건축, 사진 등에서 무엇이 다르고 어떤 점이 한계인지 짚어봤다.

자생성이라. 한동안 미술에 있어서의 자생성 혹은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자생성이라, 자생성 문제는 아포리아인가. 해답이 없는 숙제인 것인가. 물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국제화시대에 무슨 자생성 운운이냐고. 자생성하면 괜히 보수주의자 혹은 국수주의자의 냄새가 나는 것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미술에 있어 이것은 여전히 하나의 화두며 버릴 수 없는 과제다.

자생성이란 무엇인가

미술에 있어 자생성은 최소한 두세 가지의 측면을 고려하게 한다. 하나는 ‘자생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론에 해당하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시점에서 그와 같은 자생성 문제가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효하다면 어떻게 적용시켜야할 것인가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제경쟁력의 확보를 위해서도 자생성 문제는 커다란 비중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 조국은 식민지와 분단시대를 하나의 멍에처럼 등에 메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까 제국주의의 후예로 가해자 입장에 섰던 구미열강과 피해자였던 우리의 처지와는 출발점부터 상이하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반세기가 넘어도 친일잔재 문제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구조 속에서 자생성 문제는 자연사할 수 없다. 하여 자생성 문제는 끊임없이 부활한다.

몇몇 작가들이 자생성 문제를 큰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문제는 이것에 대한 주목이 어떻게 실제 창작에 반영되는가이다. 자생성 문제를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접근해왔는가, 아니면 너무 국지화하여 담론의 폭을 좁히지는 않았는가. 창작에서의 자생성 문제는 입으로 떠든다고 이뤄질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관념적인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시대정신의 문제인 것이다. 파리나 뉴욕의 문제이기에 앞서 우리 서울의 문제다. 식민지와 분단 모순이 없는 파리와 뉴욕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우리 한반도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도 고조선이 아닌 當代의 과제다. 현대미술이기에 앞서 당대미술로서의 충실도가 중요하다.

‘자생성’ 하니까, 무조건 ‘우리의 것’ 하여 향토미술 같은 것으로 입지를 좁히는 부류가 있다. 소재주의의 폐해다. 한복을 입은 인물을 그린다고, 초가나 단청을 그린다고 한국회화가 아니듯이 특정 소재에 천착한다고 자생성 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좋은 교훈을 상기할 수 있다. 바로 일제시대의 조선 향토색론이 그것이다. 조선미전의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조선의 향토를 그리라고 권장했다. 그 덕분인지 미술계에 시골풍경이 유행했다. 화가가 조국의 농촌을 소재로 삼아 제작하는 일은 눈 여겨 봐줄만 하다.

法古創新이 주요 덕목

하지만 문제는 현실의식의 부재다. 일제시대의 향토색론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으레 농촌을 목가적으로 다뤘다. 식민지하의 피폐한 현실은 외면하고 ‘밀실에서의 창작’으로 시대를 배반했던 것이다. 교과서에서 주입시켰던 ‘아름다운 시’ 가운데 박목월의 ‘나그네’가 생각난다. 겉으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 시였던가. 하지만 이 시의 목가적인 분위기는 곧 일제하의 피폐한 농촌현실을 왜곡 표현한 것이라 하지 않던가. 이같은 지적을 듣고 우리는 얼마나 황당했었던가. 예술이 최면제 역할을 할 때, 그것은 민족에 대한 죄악일 수 있다. 자생성 논의에서 우리는 시대정신을 주요한 항목으로 부각시켜야 하리라.

法古創新이 주요 덕목이 된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 과제다. 더불어 민족미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리라. 그렇다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우리끼리만 우물 안에서 살자는 건 아니다. 자생성을 주장할수록 국제무대의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 문제는 주체적 소화능력이다. 하여 자생성은 지금 여기서 출발되는 것이지, 결코 바다 건너의 舶來品으로 봉안용은 아니다. 미술은 결코 吟風弄月의 玩具가 아니다. 자생성 문제까지 진입을 했다면 좀 더 밀고 나가 이제 시대정신을 껴안으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시대의 작가들에게 드리는 고언이다. 현실의식이 부재한 자생성 논의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나그네’ 교과서의 수준에서 진일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구름에 달가듯 가는 나그네만 노래할 것인가. 그것도 술 익는 마을이나 읊조리면서.

윤범모 / 경원대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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