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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고전비평을 비평한다
특집 : 고전비평을 비평한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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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서 '대화'로 나아가다

고전비평은 과거와의 껄끄러운 대화다. 그것은 준비된 해답을 뒤로하고, 고전의 新生을 찾아나서려는 不和의 정신이다. 오늘날 학자들의 고전탐구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번역, 주석, 인물론, 테마론, 시대연구, 해설, 비평 등 과거와의 대화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것은 고전비평의 비제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주로 지난 2000년 이후 ‘저술’의 형태로 나와있는 고전비평의 양상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점은 모두 ‘번역’과 ‘해설’적 연구가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유와 언어라는 해석적 그물에 통과시켜서 고전을 환골탈태시켜내는 일이다. 초점이 현대적 환골탈태에 있지만, 날을 빳빳하게 세운 정신적 대결을 펼치기란 쉽지 않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대형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오늘고전을읽는다’ 시리즈의 ‘삼국지의 영광’(김문경), ‘대학’(김기현), ‘법화경’(정승석)이 고전에 대한 새로운 번역과 해설로서 그 존재가치를 반짝이고 있다. 가령 ‘대학’은 이 고전의 ‘일일신우일신’ 관념을 ‘進步’라는 키워드로 해석해 서구의 물질적 진보의 대립적 개념쌍으로 제시했다. ‘법화경’은 경전인 이 책을 당대 민중들이 즐겨 읽었던 텍스트로 간주하고 동아시아문명 교류의 큰 틀 속에서 읽어낸 산물로 탈경전화를 시도했다.

빳빳한 정신적 대결 드물어

그린비출판사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도 풀이하면 고전 다시쓰기로, 비평적 접근의 사례가 될만하다. 燕巖의 사상을 들뢰즈의 ‘유목적 철학하기’의 동양적 전범으로 읽어낸 ‘열하일기, 그 유쾌한 웃음의 시공간’(고미숙),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풀어간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권용선)도 비슷한 책이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에 오면 이 시리즈는 확실한 비평적 관점을 획득한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경제학)는 맑스의 ‘자본론’을 자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관한 책으로 읽어냈다. 맑스가 자본에 대한 어떤 ‘이론’을 제시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자본의 전제가 되는 것을 들춰내고자 했고, 자본과 공존하는 ‘외부’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이로써 결국은 자본에서 벗어난 세계를 사유하고자 했다는 믿음 아래 ‘자본론’에 대한 자신의 오랜 독후감을 펼쳐냈다.

총서류 가운데 아카넷의 ‘대우고전총서’와 책세상의 ‘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시리즈도 언급할 만하다. 둘 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거나 재번역이 필요한 동서양 고전들을 원전으로 번역하는 데 의의를 둔다. 번역시 가미되는 역자의 새로운 해석, 역자해제, 번역할 텍스트를 확정하는 작업이 모두 고전비평의 전단계가 되는 작업들이다. 특히 ‘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는 책의 형태를 취하지 않은 선언문이나 서문 등을 발췌해서 고전으로 제시하는 등 정전의 탈구축을 시도해 신선함을 준다.

비평방법론으로서의 ‘유비’ 또는 아포리즘

순수하고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전비평을 실행하는 거의 유일한 학자로 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철학)가 꼽힌다. 김 교수는 ‘노장철학의 해체적 독법’,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다산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등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고전 텍스트를 독창적 맥락에서 해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체계 속에 꼼꼼하게 갈무리하는 걸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효형출판 刊)는 하이데거의 후기사상과 불교사상을 모든 측면에서 철저히 비교해낸 책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無와 空의 신비를 깊이 체득할 것을 역설하는 불교의 화엄학과 동일한 사태를 지향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인데, 동서양 철학을 부드럽게 대화하도록 만드는 비교철학적 방법을 썼다. 고전비평 방법론으로서의 ‘유비’와 ‘대조’를 전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혜강 최한기의 사상을 논한 ‘운화와 근대’(박희병 지음, 돌베개 刊)는 적극적 고전비평으로 ‘비판’의 자세를 취했다. 논문 형식을 버리고 문제들이 꼬리와 꼬리를 물도록 하는 아포리즘적 에세이를 택해 성공적으로 혜강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현구 호서대 교수(동양철학)는 이 책에 대해 “저자는 최한기 사상을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한 기존 관점과 ‘근대성론’ 관점에서 보는 자신의 것을 성공적인 긴장관계에 뒀고, 개화사상과 최한기를 연결한 기존의 관점을 매우 설득력있게 비판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신오현 경북대 교수(철학)가 펴낸 ‘원효철학에세이’(민음사 刊)는 서양철학 전공자로서 불교철학의 핵심인 원효사상을 해박하게 이해, 학계의 원효 이해를 매섭게 비판한 보기 드문 책이다. 고영섭 동국대 교수(불교학)는 이 책을 ‘세계어로 읽어낸 원효철학’이라고 평하는데 “불교와 철학의 대비와 대결 내지 비교를 넘어서 이미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밖에 동양고전에 대한 비평적 작업은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에 의한 개념적 접근, 권오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철학) 및 유봉학 한신대 교수(국사학)에 의한 사회문화사적 접근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렇듯 단행본으로 출판된 고전비평은 ‘책’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 ‘사상’이라는 것을 텍스트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고전비평’이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는 국문학계도 마찬가지다. 정민 한양대 교수, 안대회 영남대 교수, 김풍기 강원대 교수가 고전비평가로 두드러진다. 정민 교수의 논문 ‘서포만필을 통해 본 김만중의 비평관점’, 책 ‘석주 권필과 그의 시대’, 안대회 교수의 ‘조선후기시화사’는 이 방면의 대표적 작업이다. 김풍기 교수는 “고전에 대한 비평은 기본적으로 그 고전이 잉태된 역사, 문화, 사회, 철학의 맥락 속에서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1980년대 초반 조동일 교수의 ‘한국문학사상사시론’이 출간된 후 이런 경향이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걸출한 성과물은 없는 상태”라고 전한다. 돋보이는 연구물은 김영 인하대 교수의 ‘조선후기 한문학의 사회적 의미’(집문당 刊), 최귀묵 부산대 교수의 ‘김시습의 사상과 글쓰기’(소명출판 刊) 등이 있다.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홍기빈 지음, 책세상 刊),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박순성 지음, 풀빛 刊),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학’(민문홍 지음, 아카넷 刊) 등이 고전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보여주는 책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래 출간된 가장 ‘독한’ 주류경제학 비판서인데, 비판의 근거로 고전을 재해석하고 있다.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에서 박순성 동국대 교수(경제학)는 스미스를 자유주의를 이해하는 통로로서 설정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스미스를 분석·해부함으로써 우리의 단순화한 스미스 및 자유주의 이해를 한걸음 심화시켜 주고 있다. 이들은 고전에 대한 경직된 해석, 표피적 이해를 새로운 해석으로 대체해내고 있다.

한국고전에서 서양고전까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가 이끄는 ‘정암학당’이란 모임은 희랍고전 다시읽기의 메카다. 김인곤 서울대 교수, 김재홍 가톨릭대 교수 등 국내 희랍철학 전공자들이 모여서 플라톤의 ‘국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카’, ‘헬레니즘의 철학’ 원전을 읽고, 번역하고, 관련 논문을 써내기를 몇 년을 해왔다. 올해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있는데 이들의 작업은 기존 국내번역물과 내용이 너무나 많이 달라지는 혁신적 번역이 될 것이라 전망돼, 비평적 성격을 획득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고전비평은 비체계적이고 소규모적으로 이곳 저곳에서 각개 약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고전의 객관화 및 당대적 맥락화와 고전의 신화화가 약간씩 뒤섞여 있는 상황이니, 고전비평은 아직 개화를 기다리고 있는 분야가 분명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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