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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비평 : 다산의 '사서연구' 다시 읽기
고전비평 : 다산의 '사서연구' 다시 읽기
  • 강신주 천안대
  • 승인 2004.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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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론적 자기수양에 갇힌 茶山

강신주 / 천안대·중국철학

강신주 박사는 다산의 '여유당전서' 중에서도 특히 사서에 대한 다산의 독해를 문제삼고 있다. 17세기 이후 유학이 불교적인 유아론에 붙잡혀있다는 다산의 비판조차 유아론의 토대에 얽매여있음을 날카롭게 읽어냄과 동시에, '주체의 수양'을 강조하는 유학적 담론의 한계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을 최근 유학적 논의들 속에서 찾아낸다.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 있어서 17세기에서부터 19세기까지는 동요의 시대였다. 이런 동요를 가능하게 했던 주된 동력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서양문명과의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총포로 무장한 함대였든, 십자가를 메고 온 신부들이었든, 아니면 해외무역을 도모했던 상선이었든지 간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마주침을 통해서 동아시아인들이 자신의 삶과 사유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세계가 반문명적인 야만이 아니라는 자각. 그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 침식하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주자학의 유아론적 토대 공략한 茶山

중심의 동요! 그것은 철학적으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담론인 주자학의 동요로 이어진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동아시아의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주자학을 '불교적'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중국 實學의 대표자 戴震(1723∼1777)도 그랬고, 한국 실학의 대표자 丁若鏞(1762∼1836)도 그랬으며, 일본 古學의 대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도 그랬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朱熹(1130∼1200)에 의해 체계화됐던 주자학 자체가 기존의 유학, 특히 湖湘學을 불교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불교적이지 않다고 출발했던 주자학이 이제 후대의 비판적 학자들에 의해서 불교적이라고 비판받게 된 것이다.
불교적이지 않으려고 했던 주자학의 핵심은 주희의 '四書集注'에 응축돼 있고, 이것을 통해서 주자학은 계속 전해질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정약용이 '대학', '중용', '맹자', '논어'에 대한 주석서를 쓴 것은 단순한 고증학적 작업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주자학의 '불교적' 해석에 대한 치열한 전쟁터로 이해돼야만 한다. 대진이나 이토 진사이와 마찬가지로 정약용이 주자학을 '불교적'이라고 비판한 것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이 ‘유아론적’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四書에 대한 정약용의 반불교적인 독해는 기본적으로 유아론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반불교적인, 따라서 유아론적이지 않는 독해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독해가 주체의 내면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바깥[=타자]을 긍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서'에 대한 반불교적인 독해를 시도하면서 정약용은 어떤 바깥을 드러냈는가. 그것은 바로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인들과, 홀로 있는 내면의 공간에서 조우하게 되는 上帝(=天)였다. 그래서 정약용에게 있어 어짊[仁]은 마음의 내재된 본질[心之德]이 아니라 타인들과 맺는 구체적인 관계에서 실현돼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덕목이 됐고, 주체의 자기반성도 유아론적 꿈이 아니라 주체로 환원 불가능한 초월적인 상제의 감시로 설명됐던 것이다.

진정한 對他的 철학 수립 못해

사서를 비판하면서 정약용의 학문은 그의 바람처럼 불교적이지 않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약용이 관계를 맺는 타인들은, 기본적으로 '유가 윤리'를 자명한 삶의 규칙으로 공유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타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들은 낯선 타자가 아니라 친숙한 이웃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정약용이 홀로 있는 공간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의식하라고 했던 상제마저도, 유가 윤리를 대상으로 하는 주체의 윤리적 욕구[性=嗜好]의 작용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낯선 초월적인 타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결국 상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명되는 인간의 자기반성은 유가적 윤리에 대한 자발적 복종에 다름 아니게 된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본질인 어짊을 내성하고 그것을 함양함으로써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주자학은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삶에서 만나게 되는 친숙한 타인들이나 홀로 있는 자기반성의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상제마저도 모두 유가 윤리 속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정약용도 불교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주자학에서처럼 내면으로 유가 윤리를 감싸고 있든 아니면 정약용처럼 외면으로 유가 윤리를 펼쳐놓든, 양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유가 윤리를 정당화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당화의 방식이 아니라, 유가 윤리 그 자체의 정당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일고 있는 유학적 가치에 대한 활발한 논의, 즉 유학적 담론들에 따르면 유학적 가치는 포스트모던시대, 나아가 신자유주의시대의 대안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다. 이런 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논객인 이승환 고려대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유교의 이상사회관은 욕망을 위한 욕망을 추구하는 대신 욕망을 반성적으로 절제할 것을 요구하며, 계산과 암수를 노리는 도구적 인간관계 대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유대감을 목표로 하고, 자유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온갖 무절제와 방종함 대신 자아를 수양해 인격을 완성할 것을 권고한다."
담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담론들은 주어진 문제를 명료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나아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담론들이 주어진 문제를 인내와 충실성을 가지고 숙고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와는 다른 담론들은 주어진 문제를 명료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거나 억압해버린다. 은폐의 전략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어진 문제를 질적으로 다른 문제로 전환시키면서 논점을 미묘하게 이동시키면 된다. 그렇다면 유학적 담론들은 상기한 두 가지 종류의 담론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현대유학에서 다산의 딜레마를 읽다

이런 질문에 앞서 더 중요한 물음이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문제에 봉착해있는가. 그것은 논객의 말처럼 욕망을 위한 욕망을 추구하는 도구적 인간관계인가, 혹은 자유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무절제와 방종함인가. 유학적 담론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사회적 문제를 기본적으로 주체의 내면의 문제, 다시 말해 주체의 결단과 수양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사회적 문제가 주체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체에 의해서 욕망을 위한 욕망이 추구되거나 이로부터 무절제와 방종함이 결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자본주의가 주체로 하여금 무한한 욕망 추구를 강제하고, 그로부터 소비의 자유를 향유하도록 구조화한다는 사실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도구적 인간관계나 무절제와 방종을 근본적으로 문제삼으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삼아야지 결코 주체만을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대다수 국민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지금, 유교적 담론이 유포시키는 욕망의 반성적인 절제, 안정적 유대감, 주체의 자기 수양 등의 주장이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유아론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유학적 담론들은 정치경제학적인 문제를 윤리적인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삶에 가하는 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고 있고, 나아가 진정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대다수 국민들의 고난을 애써 보지 않으려는 유아론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지금 유행하는 유학적 담론들도 '불교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의미에서 유학 일반이 태생적으로 불교적인 담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중국철학을 전공해 연세대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자와 다산의 미발론: 존재론적 감수성과 신학적 감수성의 차이', '도덕경의 논리와 자본 논리의 구조적 유사성' 등의 논문이 있고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등의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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