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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자본'의 시대, 삶의 윤리
에세이_'자본'의 시대, 삶의 윤리
  • 김용석 영산대
  • 승인 2004.04.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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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외연을 넓히는 '절제'를 제안한다

서구에서 발달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자본주의는 그 어원에서부터 우리에게 딜레마를 안겨준다. ‘자본’(capital)이라는 말은 엄청나게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다. 라틴어로 ‘머리’(caput)라는 뜻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머리의 상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된다.

서구 중세 역사에서 이 단어는 원래 소를 비롯한 가축의 머리를 가리켰다. 당시 가축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 단순히 밭갈이를 돕고 인간의 섭생을 위한 고기가 되는 것을 넘어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 상황에서 격리할 수 있고 손쉽게 그 수를 파악할 수 있어서 관리하기 편한 자산이었다. 또한 이를 다른 사업과 연계하면 우유, 가죽, 연료 등 부가적인 富나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다. 자본이라는 말은 머리 숫자라는 양적인 차원과 자산?가치의 질적인 차원을 함께 내포함으로써 인간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머리의 상징을 담은 캐피탈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목숨과 연관한 중대한 결정인 ‘사형’(capital punishment) 같은 말에 사용되었으며, 으뜸가는 것을 지칭하는 ‘수도’(capital city) 등에 쓰였다. 이상의 것들은 모두 ‘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핵심적이고 본질적이며 으뜸가는 그 무엇으로서 서구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도록 했다.

대안찾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이제 21세기의 우리 삶은 어떠한가. 오늘날 자본주의는 합리적으로 경제를 기획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군림하고 있다. 어떤 경제학자가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냉정하고 신중한 태도로 자본에 대해 연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뜻이고, 대안이 없다는 것은 선택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은 억압적이다. 자유의 폭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안 찾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차원에서 지속돼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도 자본에 대한 연구는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주의를 더욱 완벽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개념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갑자기 그 중요한 ‘머리’를 없앨 수는 없다. 어떤 것이 ‘머리’가 돼야 하고 ‘머리’는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위해 인류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예측하듯 21세기 내내 자본주의의 근본이 유지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의 개념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할 것이다. 그런 노력이 주는 효과는 두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다. 노력의 과정 어느 순간에 패러다임 전환이 보상처럼 주어질 수 있으며, 노력의 부산물이 자본주의 자체의 반성적 성숙에도 자극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대안적 개념 개발이야말로 21세기의 중대한 과제(capital task)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안에서 일상적 삶의 대안들’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제시한다. 이 과제 역시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것 못지않게 지난함을 예고한다. 바로 자본주의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언행일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는 일상적 윤리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자본주의와 연관해서 언행일치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욕구를 ‘유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욕구가 견인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필요한 것을 생산함으로써 욕구를 충족시켰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이 욕구를 유발한다. 생산이 욕구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욕구가 생산에 의존한다. 생산과 욕구의 관계는 생산의 욕구이자, 욕구의 생산인 것이다. 진보된 자본주의 생산 체제는 각 개인이 본질적이라고 여길 정도의 ‘필요한 것들’을 무수히 생산해 내고 있다. 그것은 재화일 수도 있고 서비스일 수도 있다. 또한 미적 쾌감과 오락성을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지식과 정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산해 낸 것들이 현대인의 삶에서 본질적 필요성으로 유도되면서 그들의 삶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유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언행일치란 무엇인가. 자신이 말한 바를 자신의 의지로 실천한다는 뜻이다. 물론 언행일치는 항상 쉬운 과제가 아니다. 하지만 유도된 삶의 체계 안에서 인간의 주체적 삶은 더욱 실현되기 어렵다. 사람들이 현대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비판하거나 그에 대해서 비관적 견해를 가져도 그 개선이 여의치 않은 것은 이러한 상황과 밀접하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체제를 대하는 현대인은 ‘이성의 비관주의’에 ‘의지의 낙관주의’가 쉽게 동반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어느 체제보다 의지와 실천에 딴죽을 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주체적 삶을 위한 대안으로서 ‘절제’를 실천하려 한다. 즉 ‘자기 조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절제는 자본주의 안에서 실천하기 까다로운 덕목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경제적인 활동을 자극하는 체제인데, 절제는 시장 수요의 위축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대안은 있다. ‘이타적 절제’가 그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단순히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덜 쓰는 대신 타인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즉 아낌의 차원에서 ‘나눔’의 차원으로 절제의 실천을 넓히는 것이다. 절제가 단순한 절약에 머물지 않고 나눔의 차원으로 확장될 경우 경제적인 면에서도 수요 감소에 의한 경기 위축을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선으로서 절제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른바 ‘曠野운동’으로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운동은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의 단호함으로 소비사회가 주는 편리함의 유혹을 물리치고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적 연대를 가지면서 소비주의 상품문화를 대표하는 쇼핑, 텔레비전, 신용카드, 휴대전화, 액세서리, 가공식품, 자가용 등의 사용을 절제한다.

유도된 삶과 주체적 삶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일상적 실천이다. 자본주의 안에서의 대안적 삶은 개인적일 때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한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제공하는 가능성일 것이다. 이것은 21세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개인성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것과 연관 있다. 이는 또한 유도된 삶에 대응하는 주체적 삶의 본질적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다. 개인적 실천은 다양하다. 그 가운데서도 ‘안식’을 실천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TV 안식년’ ‘휴대전화 안식월’ ‘컴퓨터 안식주’ 등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는 효과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하고 불필요한가를 구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절제가 단순히 욕구를 억누르고 인내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억눌린 스프링이 반발 탄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가 언젠가 튀어 오를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절제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주체적 삶이 제어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긍정적인 절제를 만들어낸다. 절제는 극기와 달리 자율적 판단의 조건을 형성함으로써 얻어내는 자유의 한 형태인 것이다. 유도된 삶의 환경 속에서도 주체적 삶이 결국 추구할 것은 자유의 외연을 조금 씩 넓혀 가는 것이다.

김용석 / 영산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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