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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_주명덕의 '도회풍경' 展
사진비평_주명덕의 '도회풍경' 展
  • 신수진 연세대
  • 승인 2004.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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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넘어서는 순응적 관조의 힘

사진가 주명덕(1940~)의 개인전이 젊은이들의 거리로 알려진 홍대 앞에서 열렸다. ‘도회풍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번 전시는 서울의 풍경을 담은 작가의 최근작 위주로 구성돼 눈길을 끌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가 살아온 시대에 대한 작은 역사다. 그러한 역사성은 특정 매체를 다루는 작가의 경우, 그 매체가 지닌 표현과 양식적 특징을 통해 가시화되고 명료해진다. 주명덕의 사진은 매체가 지닌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기록성에 뿌리를 두고 그가 살아온 한국 사회와 환경에 대한 해석을 담아 놓은 그릇이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던 청년 주명덕의 관심사는 사진과 그에 담겨지는 현실의 단면이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담은 ‘홀트씨 고아원’(1966)으로 상징되는 그의 현실인식은 사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서의 다큐멘터리와 잘 맞아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행보는 월간 중앙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했던 1973년까지 ‘명시의 고향’, ‘한국의 이방’, ‘국토의 서정 기행’, ‘한국의 장승’ 등 지금은 한국적인 소재의 전형으로 자리 잡은 전통의 모습에 대한 선구적인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의 사진을 찍혀진 내용만으로 판단하고자 한다면 1980년대의 ‘절의 문창살 무늬’를 비롯한 사찰과 불교관련 작업은 이전의 작품들과 외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비해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잃어버린 풍경(Lost Landscape)’ 연작을 비롯한 풍경 사진들은 여전히 ‘한국의’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산과 땅을 소재로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외형적 변화를 나타냈다. 흑백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계조의 반쯤을 떨어내고 어두운 톤으로만 만들어진 풍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찍혀졌는가에 더 이상 집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사진가의 시각을 만드는 진정한 사진의 힘은 ‘무엇을 찍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찍었느냐’에서 나온다. ‘섞여진 이름들’(1968)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사진이 지극히 현실 참여적인 내용을 다뤘다고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사진들이 주는 인상은 비판이나 분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만 보는 사람은 사진에 담겨진 현실에 들어앉은 비극의 무게만큼 슬픔을 느낄 뿐이었다. 이러한 ‘거리두기의 시선’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다가 작품의 소재적 외형을 완전히 누르며 전면에 내세워진 것이 바로 풍경 연작인 것이다. 

주명덕의 풍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톤의 표현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선명하고 풍부하게 살려낼 수 있는 것이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에 담겨진 풍경의 구성 요소들은 지극히 좁은 범위의 계조 속에 축약됐다. 꾹꾹 눌러 검게 인화한 사진들 앞에서 무언가를 뒤져 찾아내야 하는 것이 보는 사람의 숙제다. 이것은 사진가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을 바라보았듯이 그 실눈 뜨고 바라보는 듯한 작가의 경험을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서도 유도하는 소통방식인 것이다.

거리두기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장치로서의 톤의 조절은 이번 ‘도회풍경’에서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엄밀히 말하면 이전의 자연 풍경과 같이 여전히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부분이 중간 회색조에 가깝지만, 소재의 존재감은 좀더 분명해 졌다. 마치 ‘한국적 소재’와 ‘거리두고 바라보기’라고 하는 내용(무엇을)과 양식(어떻게)의 양극단을 오고 가다 절충적 접점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도회풍경’의 사진들은 대체로 편안하고 차분하다. 풀밭에 바싹 다가들지도 않고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산을 조망하지도 않는다. 사진가의 눈높이 시선이 유지되면서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로부터 유추되는 시점(viewpoint)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떨어져서 응시하는 방법으로 온전하지 않은 날개를 부여받은 새를 하늘에 얹어주고,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 오른 나뭇가지와 치솟은 빌딩을 바라본다. 견조한 기둥에 어슴푸레 나뭇잎 그림자가 드리우고, 두텁고 큰 유리창에 송글송글 빗방울이 맺힌다. 

이 모든 것은 인공물과 자연물이 공존하는 도시환경과 그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인간의  섬세한 감성에 대한 보고다. 도시를 만들어가며 도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고,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동경하는 존재로서 부여받은 태생적 본능의 표출이다. 소리 내어 비판하기 보다는 순응적으로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간의 주명덕식 바라보기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태도였는지가 분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호들갑스럽지 않은 애정으로 지켜보기’이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고, 거리를 두되 버리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주명덕에게 서울은 그런 대상일 것이다.

‘관조’는 머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낯선 곳을 지나쳐가는 사람은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대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 이번 전시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흑백사진들이 전형적으로 머무는 사람의 시선을 담고 있다면, 석 점의 대형 컬러 사진들은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보여준다. 

선명한 붉은 색의 프레임으로 경계선을 친 흔들린 도시 풍경은 주명덕 특유의 관조적 시선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다분히 비판적으로 서울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사진들이 대상과 관객에 조응하는 방식은 센세이셔널하며 불안정하다. 물론 이 또한 작가가 도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러한 보는 방식의 혼재는 그리 넓지 않은 전시 공간에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도회풍경’ 전에 걸린 열아홉 점의 사진들 중 뼈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은 한쪽 벽면으로 빼꼭히 채워진 열 점 미만의 작품들이다. 그 밖의 사진들은 찍혀진 어법이 동일해도 인화방식이 달라 구분되거나, 인화방식이 같더라도 대상을 조망하는 심리적 거리가 확연히 달라서 또 한번 경계를 만든다. 두 점의 자화상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이야기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한 공간에 떠 있는 형국이다.

전람회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작품과 작품이 걸리는 공간의 조화를 고려한 사진의 선택과 디스플레이가 필수적인데, 그러한 측면에서 이번 전시는 아쉬움을 남긴다. 도시라고 하는 소재적인 공통점만으로 사진들을 묶어서 전시를 기획한 점이나, 그런 사진들을 제한된 공간 내에서 되도록 많이 보여주려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를 통해서 만나는 주명덕의 신작은 그의 시선이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반갑다. 거창한 사건을 좆지 않더라도 인간사의 허와 실에 대해 지적할 수 있고, 산 속을 헤매지 않더라도 일상을 넘어서는 禪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수진 / 연세대 사진비평

필자는 연세대에서 ‘사진의 촬영기법이 깊이 표현양식에 미치는 효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사진영상의 표현양식 기술체계를 위한 기법과 심미적 인상의 관계 분석’, ‘사진의 공간표상 양식에 있어서 조명의 효과’, ‘사진의 표현양식과 리얼리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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