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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팬데믹, 믿음과 사유체계를 바꾸다
최초의 팬데믹, 믿음과 사유체계를 바꾸다
  • 역사비평
  • 승인 2020.09.2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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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이 ‘감염병과 사회적 대응’에 대한 기획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이번 132호에선 두 번째로 「유사 이래 최초의 팬데믹-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을 살펴봤다. 글쓴이는 이상동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다. 이에 주요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역사비평> 132호에서 확인 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세기 이전의 전(감)염병에 대해서는 데이터 수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는다. 중세 흑사병 창궐 이전에도 페스트가 야기한 팬데믹이 존재했다. 비잔티움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 황제 통치 시기에 처음 발생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부르는 재난이 그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불리는 이 감염병은 541년 처음 발병하여 750년까지 2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방대한 지역에 걸쳐 창궐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비잔티움제국과 북아프리카, 레반트 지역, 소아시아 및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한 지중해 전 권역과 갈리아 지역, 영국 제도, 사산조 페르시아 혹은 중국을 포함하는 등 광대한 지역에서 창궐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전에도 전(감)염병의 창궐로 인간사회가 집단적으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으나 특정 지역에 국한된 에피데믹 수준의 역병으로 팬데믹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몇 년 창궐했다가 휴지기를 갖고, 다시 창궐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2세기 동안 방대한 지역에 걸쳐 11년에서 17년을 주기로 역병(페스트)이 총 18번 창궐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고 부르며, 그 현상은 팬데믹으로 평가된다. 

 

유사 이래 최초의 팬데믹, 인류를 위협

 

문헌 자료에 묘사된 증상은 이때의 역병이 페스트임을 가리킨다. 더욱이 기록 속의 또 다른 여러 증상, 즉 환각 증세와 두통, 설사를 동반한다는 내용과 증상의 지속 기간, 화농이 터지면 생존 가능성이 커졌다는 사례, 생존자가 겪는 장기적 후유증으로 허벅지와 혀의 기능이 약하된다는 등의 내용은 이 역병이 페스트임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상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페스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인간사회에서 창궐한 첫 번째 페스트라면, 그 발원지는 어디인가. 병리학적인 면에서 전(감)염병은 특정 장소에서 다양한 조건들이 결합되어 발병하고, 그것이 여러 변수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며, 특수 조건하에서 폭발력을 발휘하여 인간사회에서 창궐한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도 이와 같은 병리학적 메커니즘을 적용해보면, 인간사회가 이 역병을 인지하기 이전에 다른 곳에서 병인이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연대기적·지리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중앙 아프리카의 페스트 발원지에서 에티오피아로 페스트가 확산되었고, 그것이 이집트(특히 펠루시움)를 비롯한 비잔티움제국에 전파되었다. 요컨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발원을 고대 발원지 중 중앙 아프리카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다.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발생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대한 대응(반응)은 어떠했을까.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역병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향의 정도에 따라 그에 대한 대응(반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역병이 비잔티움제국과 지중해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느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논쟁의 골자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비잔티움제국을 비롯하여 지중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견해의 대립이다. 전자는 인구와 세금 수입의 급격한 감소를 근거로 든다. 후자는 당대의 문헌 자료에서 묘사된 역병의 참상은 수사적 과정이며 세수 확보에 큰 차이가 없다는 입장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창궐하는 동안 성 세바스찬이 죽어가는 이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중앙 아프리카에서 발원해 인구 감소로 이어져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당대 사회에 미친 영향의 정도가 어떠했든, 역병이 창궐함에 따라 그에 대한 대응·반응은 존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역병 창궐로 상승한 물가와 임금을 이전 상태로 되돌릴 것을 명령했다. 또한 관리 소홀로 황무지가 된 토지를 특정인에게 할당하여 배정하고 그 토지에 세금을 부과했다. 세수 확보가 목적이었다. 

 

정치·문화적인 면에서는 황제의 신성함을 부각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비잔티움제국의 신민들은 역병을 겪으면서 정치권력, 즉 황제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자기-신성화’ 정책을 추진했다. 본인을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를 통해 황제의 신성함이 강조되었고, 그럼으로써 아무도 그의 신앙심과 그에 대한 신의 은총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대중적 인기와 권위를 회복한 것이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문화적으로도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했다. 동정녀 마리아 숭배의식의 번성과 성상 숭배의 성행이 그것이다. 현실의 어려움이 커질수록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6세기 중반의 역병은 신의 용서와 은총을 더욱 갈망하게 했고, 그에 따라 성상을 숭배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 결국 역병 창궐에 대응·반응하는 과정에서 믿음·사유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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