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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_오형근의 '소녀 연기 Girl's Act' 展
사진비평_오형근의 '소녀 연기 Girl's Act' 展
  • 전영백 홍익대
  • 승인 2004.04.01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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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된 일상, 그 모호함이 갖는 매혹

일상에 몸담고 있는 우리에겐 누구나 명칭이 있다. 선생님, 아저씨, 아줌마, 언니 등. 그런데 이 ‘호칭’(naming)은 사회관계 망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 상당 부분을 시각 이미지가 결정한다. 눈의 조리개는 대상을 포착하는 즉시, 머릿속의 분류 체계를 발동시켜 어느 범주에든 집어넣는다.

오형근의 사진 연작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름 붙이기’ 작업에 적잖은 방해를 한다. 엄밀히 말해 방해라기보다 그 작업을 그대로 되비쳐 그 일이 실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가를 보여준다. 더불어 그 분류 과정에 얼마나 우리가 ‘목숨 거는가’를 조소하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 선 모델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수월하게 그들과 동일시하고 어느새 오형근의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우리가 된다.
보고 보이는 시선의 권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린 제일 멋진 모습으로 폼을 잡는다. 그런데 아무리 멋있게 스스로를 과시해도 사진의 모델들은(우리들은) 이미 설정된 호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개성 있는 모습을 연출해도 어느새 유사 부류의 집단 전체성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건 그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반복기제가 그 유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작품끼리의 개별적 차이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차이가 전체 작업에서 그리 중요한 건 아니라는 의미다. 그보다 전 작업을 꿰는 이슈가 더 문제다. 그래서 오형근은 시각적이기보다 개념적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선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표상에 집요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작가의 집단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1990년대 작업에서 아줌마, 옛 배우 등 일정 부류의 사람들을 다룬 작업에서 나타났고, 이번엔 십대 사춘기 소녀들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사실 우리문화는 개인주의인 서양 문화에 비해 이런 집단적 분류를 상당히 선호한다. 일정 정체성에 대한 우리문화의 이미지 표상은 일반인들 사이에 꽤 쉽게 공유되는데, 이건 높은 집단동일시를 가져오지만 또한 고정관념을 부추기기도 한다. 외양과 행위를 규명하는 집단적 코드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빨리 떠오른다는 건 그만큼 코드가 경직됐다는 걸 의미한다. 개인은 집단의 이름으로 묻힌다. ‘소녀 연기’전은 그런 우리문화의 단면을 작가의 비판적 시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시 이 사진들이 소녀들의 사진이 아니라 소녀들의 연기사진이라는 점이다. 핵심은 이들의 포즈와 표정은 ‘가짜(fake)’라는 점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연출된 정체성을 직면하는 셈이다. 이런 세팅은 플래쉬의 반사 효과와 더불어, 그것이 실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배경으로 만들어 놓은 삼류 사진관을 연상케하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작가의 말대로, 이 ‘소녀’라는 부류는 주류 연예문화가 규명하는 ‘소녀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대중 매체에서 제시된 외부 이미지를 본 따 “인공적으로 연습된 공식”을 드러낸다. 결국 ‘본유적인 스스로의 정체성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후기구조주의라는 거창한 이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오형근의 소녀들을 보면서 수월히 공감하는 것이다.

‘소녀’라는 집단은 그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 덕택에 더더욱 거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작위적 이미지를 수용한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실은 우리의 욕망이다. 소녀에 대해 우리가 가진 환상의 투영이다. 소녀들의 어설픈 연기를 보면서 순수와 인위성, 오리지널과 위조 사이에 동요하는 우리 자신을 확인한다. 우린 거의 누구나 순수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한다. 가장 때묻지 않은 10대 소녀들까지도.

그래서 오형근의 사진에 찍힌 여고생들은 거의 프로급이다. 누구는 이영애고 누구는 최지우다. ‘연예 미디어’를 통해 욕망의 대상이 되려 노력하는 사진 속 소녀들. 어느 부류보다 ‘순수성’을 대표한다고 믿어지는 이 소녀들에서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인위적 표정과 전형적 포즈를 읽어내는 관람자의 모호성. 이들을 욕망할 것인가, 아니면 경멸할 것인가. 가장 순진하게 보이는 이들이 주는 메시지는 결국 순수성의 부재 아니던가. 

그러나 지나치게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 작가가 주목하는 십대 여고생이라는 존재는 사실 상당히 매력적이다. 작가가 강조하듯, 이 시기의 소녀란 “정서적인 흔들림”을 겪는 나이고 “소녀와 여성이라는 모호한 경계에 있는” 세대인 것이다. 작가는 이런 소녀의 모호성에 끌렸다. 흥미로운 한 예로, 작가의 반복되는 유사한 사진구성에서 무엇보다 시선의 각도가 독특하다. 다수의 작품에서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전체 화면에서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처리돼 있는데, 이렇게 되려면 작가의 시점이 거의 땅에 붙어야 할 상황이다. 카메라의 눈은 급격한 각도로 아래에서 위로 모델들을 올려 본다. 그 시각의 높이에서 십대의 소녀들은 우리(작가/카메라)를 도도하게 내려본다. 사춘기의 반항기 어린 도도함이 베어 있다. 그 시점에서 소녀는 청순하고도 가련하게, 때론 분노를 참거나 경멸하듯 우리를 응시한다. 동조를 구하는 표정인 듯 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계이기도 하다.

‘중간 영역'은 경직된 이분법의 구조를 깨는 데 효과적이다. 일상적인 분류 틀에 쉽게 들어가지 않는 대상들은 사실 우리를 무척 불편하게 하지만, 그 틀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규격화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 연기’는 우리로 하여금 결국 우리는 소녀를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다만 ‘소녀’라고 ‘이름 붙여진’ 존재들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말이다. 이름 붙이기는 그 이름대로 보는 것이다.  

전영백/ 홍익대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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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 2004-04-04 17:40:52
사진비평의 필자가 이영준교수 같은데...
기사 끝에 전영백교수 이름은 무엇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