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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아이레노포이오이'의 봄
1973년 4월, '아이레노포이오이'의 봄
  • 김용준
  • 승인 2004.04.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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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6

 

▲1975년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

1973년 4월 '씨알의 소리' 3주년 기념호에는 '아이레노포이오이'라는 희랍어 제목의 함 선생님의 글이 실려 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목마르던 강산에 비가 내리고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자라지 못한 보리도 알을 가지고 병아리는 껍질을 깨치고 나왔습니다.
안녕을 물었지만 사실은 안녕이 없는 것을 잘 압니다. 삶 그 자체가 괴롬인 것은 그만두고라도 사회의 모양사리가 이렇게 되고는 안녕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씨 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씨알에게 안녕이 없다면, 어디 누구에게는 안녕이 있겠습니까. 복소무완란(覆巢無完卵)이라 둥지가 엎어지면 성한 알이 없습니다.
나는 일전도 늘 신변을 보호해준다고 매일같이 동정을 살피는 어느 기관의 분이 전화로 "안녕하십니까"하고 묻기에 곧 맞받아서 "안녕히 어떻게 있겠습니까?"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더군요. 그래 "사람을 가만 아니 두고 이렇게 못살게 구는데 안녕이 왜 있겠어요?" 했습니다. 지나고 나서는 나도, 비록 쏴 논 살이기는 하지만 말에 너무 가시 돋친 것 같아서 뉘우치기도 했습니다마는 정말 우리에게 안녕은 없습니다.…(중략)
그러기에 나는 도리어 반대입니다. 축복의 인사 대신 차라리 한탄의 넋두리를 같이 하고 싶습니다. 그 아픈 심정의 갈피 속을 들여다보고 넋두리를 같이 하고 싶습니다. 그 아픈 심정의 갈피 속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나는 요양소를 찾아갔다가 그 환자들 앞에서 차마 고운말로 하는 위로의 소리가 나가지 않아서 "이 폐병장이들아, 이 저주받은 것들아, 왜 살아 있느냐? 어서 뒈져버려라!"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도리어 기뻐하고 고마워했습니다. 그후 나는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위로의 말이나 매약방의 약 같은 철학, 설교로는 그들에게 별로 힘을 줄 수 없지만 내 마음이 뜨거워서 하기만 하면, 퍼붓는 욕설로 도리어 그들의 가슴을 가볍게 하고 소생하는 힘을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랬습니다. "살기는 뭘 살겠다고 밤낮 체온기를 꽂았다 뺐다 하느냐? 다 집어던지고 죽을 각오해라, 네가 무슨 죄 있느냐? 이 나라의 병을 네가 맡아서 앓는 거다. 사회가 이렇게 되고는 어느 놈의 폐가 썩어도 썩게 마련이고 어느 년이 문둥이가 되어도 되게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네 등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러니 이왕 맡았으면 삼 년도 십 년도 실컷 앓다가 고스란히 죽을 생각해라. 그러면 가엾은 이 폐병장이 문둥이 나라의 짐들 하나 깨끗이 치워준 것 아니냐?" 무식한 욕은 도리어 굶어죽는 떡이 될 수 있지만 발라바치는 간사한 위로는 칼보다 더 아프게 생명을 갈아냅니다.…(중략)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는 것은 첨부터 행복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입니다. "안녕"할 때 잘 먹고 잘입고 잘 살란 말 아닙니다. 고통을 받고 억울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지키란 말입니다.…(중략)

복이 있다. 아이레노포이오이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름을 받을 것이다.

했습니다. 아이레노포이오이란 아이레네 곧 평화라는 말과 포이에오 곧 만든다는 말을 한데 붙여서 만든 말입니다. 평화를 짓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씨 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평화를 짓는 것은 씨 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인간의 씨알도 그렇습니다. 겸손히 역사의 바닥에 내려갈 때 혼의 평안은 오고 혼이 평안을 얻을 때 거기서 우주의 영의 부름에 의한 활동이 기쁨과 영광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아이들이 서로 치고 받아 그 피와 시체를 더럽혀놓은 역사의 동산을 다시 푸른 생활로 갱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아 봄이 왔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시오.> (전집 8:76-81)

이 글에서 독자 여러분들은 1973년 당시의 암울했었던 우리나라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체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30여명의 전임교수를 영입한 나의 고려대학교 공학부장직은 1973년 2월말로 끝이 났다. 3년간의 교무위원직 기간에 자정이 다 돼서야 귀가한 적이 절반은 넘었으리라고 기억된다. 좌우간 힘들고 바쁜 3년간이었다. 그런데 그 3년이 지났는데도 나에게는 또다시 생각지도 못했던 KSCF 이사장이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위에 소개한 선생님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관원은 물론 중앙정보부의 함 선생님 담당 요원이다. 참으로 나무랄 데 없는 점잖은 외모를 갖춘 노신사였다. 당시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기관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큼 근엄한 모습의 초로의 신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이 신사의 내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방의 목적은 소요되는 비용은 자기들이 얼마든지 담당할 터이니 함석헌 선생님을 모산학교에 내려가 계시도록 주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시 말해서 함 선생님을 서울을 떠나서 모산학교를 전적으로 운영하시는데 전념하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모산학교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자기네가 부담하겠다는 요지였다. 모산학교란 천안의 씨알농장이 도립병원 용지로 수용되면서 마련된 요새 회자되는 용어를 쓴다면 일종의 대안학교와도 같은 고등공민학교를 가르치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기억 못하지만 이 학교를 인수한 시기가 대체로 1973년 여름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님 전집 8권에 수록되어 있는 '毛山夜雨'라는 1974년 10월호 '씨 알의 소리'지에 발표하신 글이 이 학교에서 쓰신 선생님의 유일한 글로 남아 있다. 이 학교를 선생님 모시고 여러번 방문했었던 일이 기억난다. 천안과 온양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즈음 나도 어지간히 간교해져 있었다. 선생님께는 물론 말씀조차 드리지 않았으면서도 이 기관원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선생님의 인격에 어디 쉽게 그와 같은 제안이 잘 받아들여지겠느냐 그러니 시간을 가지고 선생님께 기회를 보아서 말씀드려 보겠다는 식으로 지연작전을 폈다. 몇 번 독촉 방문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때마다 잘 넘기곤 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눈치를 챘는지 내방이 끊기고 말았다.

막상 KSCF의 이사장에 총무대행까지 겸하고 있었으니 나의 소위 종로 5가 기독교회관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7층 남쪽 끝 방은 당시 김관석(金觀錫) NCC 총무님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 끝 방은 KSCF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에 학교는 강의시간과 대학원생 세미나 시간만 제하고는 종로 5가에서 주로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KSCF란 NCC 산하의 유일한 학생운동 연합단체였다. NCC란 당시 6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었고 소위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단도 여기에 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교단이 회원으로 있는 NCC 산하의 유일한 학생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예산의 90퍼센트가 외국기관의 보조금으로 충당되고 있는데 놀랐다. 다시 말해 KSCF의 기반이 국내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외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그 기반이라고 보아야 할 지경이었다. 말하자면 국내 기반은 전무 상태였다.

주로 1973년에 있었던 일로 기억되는데 여름방학 및 겨울방학 기간에 개최되는 소위 대학생들의 연수회가 KSCF의 가장 큰 연중행사였는데 여름방학은 전주 근방에서 김동길 박사를 주제 강사로 모시고 연수회를 가졌던 일과 겨울 연수회는 광주에서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김지하 시인을 현영학 교수와 같이 하루 밤을 같이 지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KSCF 학생회장은 숭실대학교의 나상기 군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1973년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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