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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겉포장을 벗기니…
화려한 겉포장을 벗기니…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3.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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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 동양철학계의 유교관심과 그 明暗

▲ © 리브로
儒學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자연스럽게 유학에 대한 재해석 열풍으로 이어지고, 서구 패러다임에 생긴 균열 및 동북아 전략적 공동체 모색이 동북아의 공통분모인 유학에 서로 손을 뻗치게 한다.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나 동양철학 대중강연과 단행본들은 한국의 무의식에서 유교가 차지하는 지분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성균관대 BK21 사업단이 6년의 연구결과물을 '동아시아 정체성을 묻는 오늘의 시각 총서'(전4권)로 펴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들이 동서양철학자, 사회학자, 법학자와 함께 '유교의 현대적 해석과 미래적 전망' 시리즈(전3권)를 펴냈다. 그 외 '유교담론의 지형학'(이승환, 푸른숲 刊), '현대 한국유교와 전통'(금장태, 서울대출판부 刊), '유교전통과 자유민주주의 비교'(이상익, 미출간) 등 개별 연구자들도 주석학에서 완연히 벗어나 '현대와 유교'를 본격화두로 삼고 있어 주목을 끈다.

자생적 유교재해석 움직임 많아져

또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연구도 '현대유학'에 대한 탐구에 집중돼 있다. '여성 지식의 반성과 창조 : 유교 가부장제와 서구 페미니즘을 넘어서'(이숙인), '21세기 동북아시대를 위한 유학·동양학부 교육과정 개선방안 연구'(최영진), '조선 후기 사상사에 나타난 서양의 고중세 철학과 유교의 융합에 관한 연구'(안영상), '유학에 있어서 윤리와 경제의 상관성에 관한 철학적 연구'(황의동), '21세기와 동북아시아의 유교적 전통'(김성기) 등 주로 2003년 이후에 선정된 것으로 '개혁과 유교', '탈식민적 페미니즘과 유교', '현대윤리학의 유교적 기초' 등이 적극 모색되고 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동양학계의 움직임들은 '아시아적 가치론'의 제2라운드를 선언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해보게 한다.

그렇다면 이런 흐름은 유교자본주의로 후끈 달아올랐던 1990년대 후반과 질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먼저 열풍의 근거지가 90년대 후반은 '해외'였고, 지금은 자생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과거엔 아시아적 가치가 있다고 하면 그리로 몰려갔고, 없다고 하면 또 우르르 빠져나온, 그야말로 '외풍이 부는 대로 소리를 내는' 신세였는데 요즘은 우리 사회의 근대적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유학을 통해 추진하고, 유학 내에서의 과장된 예학적 요소들을 현실법칙과 근접하게 조정함으로써 근본성과 혁신성을 동시에 갖추려는 노력을 보여준다고 차별화 한다.

물론 이런 흐름이 동양철학계의 주류는 아니다. 아직까지 동양철학계는 훈고학적 학풍이 진하게 남아있으며, 퇴계학과 남명학이 각각 최고라는, 이른바 노론과 소론 식의 파벌도 넓게 형성돼 있다. 그래서 유학의 비판적·객관적 재해석은 매우 낯선 작업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런 유교의 재해석 움직임이 또 다른 중국특수를 노리면서 정치경제적 동아시아 패러다임에 편승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의 유학 담론이 갖는 진정성은 텍스트 내부에서 치밀어올라와 우리의 삶 속으로 넘쳐흐르는 부양물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이 설득력과 힘이 있는지를 검토해보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성균관대 BK21 연구단이 펴낸 총서는 "추상적 동아시아론에서 구체적 실체를 갖춘, 내실있는 동아시아론으로의 전환"을 외치며 사상, 여성, 역사, 정치의 네 분야에서 유교의 구체적 실상들을 확인하고 있어서 분석대상으로 적합하다. 이 책들은 그러나 화려한 겉포장을 뜯어내면 그 실상은 전혀 화려하지 못하고 평범하다. 고만고만한 논문들을 모아놓은, 그래서 '기존 논의의 되풀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왜 그럴까.

'연구사 정리'로 유교재해석 포장해

이 책의 모토는 동아시아의 현재의 정체성과 미래의 전망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사상적 현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상적 현실은 현실세계의 여러 이슈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상태에서 제시될수록 구체적일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문제들과 유학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유학이 이것을 어떻게 문제틀로 흡수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는지가 논문 속에서 구체화돼야 마땅할 것이다.

총서의 1권 '사상'편을 보면 동아시아 유교를 넓게 살펴본다는 취지 아래 중국, 한국, 일본의 3부로 나누고 있다. '중국'에서는 윤리, 효, 예 등 전통 유학개념이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고 '한국'에서는 중용, 양명학, 동학, 미학으로 이어지는 유교의 수용과 발전과정을, '일본'에서는 주자학의 전개와 수용, 극복에 대해 살피고 있다.

그 살피는 방식은 철학적 논의라기보다는 한중일 삼국에 존재했던 유학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훑는 방식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든다. 과연 이런 연구사 정리가 유교의 현대화, 전통의 재해석, 오늘날 동아시아의 정체성일 수 있는가. 1부 '중국'에서 '선진유가의 윤리사상과 현대'라는 글은 한국이 경제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보산업사회가 빚어내는 갈등과 모순을 안고 있으며, 윤리 도덕감을 상실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필자는 현대 과학문명에는 '사람'의 존재가 없는데, 공자의 학문은 인간학에 그 본질을 뒀기 때문에 참조점을 준다고 주장한다.

'유교의 효 사상과 현대 사회'라는 글도 "현대사회의 물질적 풍요에 따른 도덕성의 약화"를 문제삼고 결론에서는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공경, 형제간의 우애를 통해 인류사회에 '仁道'를 실현하고, 종적으로는 天을 섬기는 종교적 경지까지 이르러 효 사상의 본질을 올바르게 구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언급하면 '유가의 예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은 "자연 그 자체를 聖의 세계로 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도 성의 세계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물질 사회 속에서 빼앗긴 聖性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더욱 강한 의문을 품게 된다. 유학은 왜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단순화하며, 또한 현실에서 이뤄지기 곤란하거나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어보이는 듯한 '없는 보편성'을 강조하는가 라는 것이다. 학문이 전망을 갖기 위해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서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 그럼에도 이 책엔 우리의 현실과 유교가 무슨 관계에 있는지 구체적인 쟁점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특정 주제의 연구사 검토와 추상적 대안제시'라는 돌림노래로 유학의 각종 내용을 뚱뚱하게 채워넣고 있을 뿐이다.

중국 우위의 학문적 사대주의 여전

중국, 한국, 일본으로 논의가 풀려나가는 것은 이 책의 편집진이 유학을 여전히 중국중심의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안겨준다. 이와 관련 강신주 연세대 강사는 "여전히 중국에서 담론이 발생하고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유학의 구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담론유통에 대한 고민없이, 과거의 문헌에 얽매인 연구결과 자연스럽게 발생한 문제점이 아닌지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리 철학이라도 현실인식에 있어서는 최소한의 실증적 태도가 견지돼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제기를 해본다. 이 책은 "현대문명이 고도로 발달해 인간성을 상실하고"라는 수십년 동안 되풀이돼온 모던에 대한 개념풀이를 현실진단이라고 내놓고 있다. 이런 현실과 고도의 에센스로 추상화된 유교의 덕목들이 맞닥뜨리니 자연히 이분법적 논의구도가 되고, 현대의 병폐를 없앤 자리에 유학의 진리를 이식하는 식의 비현실적인 주장들이 되풀이된다. 지난번 '유교자본주의' 논의에서도 드러났듯 유교적 가치는 항상 옳은 게 아니다. 가령 '인맥'이라는 것도 산업발달의 동력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정실 자본주의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진실의 현실적 활용에 대한 충분한 동시대적 성찰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동양철학자들의 이런 뜬구름 잡기를 누가 귀기울여 들어주겠는가. 이번 총서는 전체적으로 이런 문제를 안고 있으며, "추상적 동아시아론을 구체적인 내용들로 채우겠다"는 의욕과는 정반대로 "더욱 추상화되고 아리송하고 불필요한 논의들을 생산해낸" 사례로 여겨진다.

이에 비해 '유교의 현대적 해석과 미래적 전망'은 '해석'이라는 말에 걸맞게 유교를 '유교의 예와 현대적 해석'(1권), '유교의 공부론과 덕의 요청'(2권), '중용의 덕과 합리성'(3권) 등 '주제론'으로 나눠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어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1권에서는 '예학'이라는 것이 일상생활을 얽매고 사회의 발전을 막아온 질곡으로 여겨져온 것을 타파하는 방법으로, 예와 삶의 문제를 철학의 울타리로 깊숙이 불러들인다. '유가 예학의 사회이론과 공동체주의적 전망'을 쓴 한도현 정문연 교수(사회학)는 '논어'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독해를 기반으로 예학의 사회이론을 근대적 공동체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가 보는 유교의 새로운 기능이란 개인적 자율과 사회적 질서가 균형을 이룬 품위 있는 사회며, 이것은 결코 강압적 공동체가 아님을 증명해나간다. 그리고 '유교의 예와 미시적 권력관계'를 쓴 김동노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푸코와 부르디외 사회이론을 원용해 지금까지 禮訟 연구처럼 거시적 권력관계에 관심을 두어온 것과는 다르게 "예에 의한 몸의 훈련과정을 통해 개인이 가족과 사회에 통합돼 정체성을 얻고 차별화돼 가는 과정"을 미시권력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마지막 글을 집필한 최진덕 교수는 '小學' 비판론을 보여준다. 소학의 마지막 목적이 가족과 사회 안에서 인간을 규율하는 데 있다기보다 인간세계를 떠나 자연세계로 돌아가는 데 있지만, 소학의 예학으로는 인간을 텅 비우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게 최 교수가 제기한 물음의 핵심이다.

2권 '유교의 공부론과 덕의 요청'에서 한형조 정문연 교수(동양철학)는 불교와 유교가 만나고 갈리는 지점에서 유교의 공부론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유학의 본래성인 삶의 기술로서의 가르침을 회복하고자 했던 주자학의 공부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강영안 서강대 교수(서양철학), 이승종 연세대 교수(서양철학) 등도 각각 '주자의 독서론'과 '근대의 지식과 덕의 요청'을 집필했는데 이승종 교수는 서양철학자로서 최진덕 정문연 교수의 '일이관지'에 대한 파격해석을 반박하는 논리를 펴기도 하는 등 박진감이 넘친다. 그리고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활용되는 영화와 문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폭넓은 데이터들은 고전과 현대텍스트 사이에 물길을 터서 서로 자유롭게 오가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현대의 텍스트를 과거의 것과 유비시키는 방식이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최근 강유원 동국대 강사는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읽고 쓴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刊)에 대해 "연암에게는 금기시한 것을 말한다고 하는 분명한 전선이 있었으나 고미숙의 글은 전혀 불온하지 않은, 유쾌한 글을 원하는 타겟 독자만 있었을 뿐이다. 덧붙여, 나는 고미숙의 책을 통독한 뒤 내다 버렸다"라고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도올 김용옥의 '혜강 최한기와 유교'(통나무 刊)도 화려하고 묵직한 서론에 비해서 정작 본론에서는 얘기를 하다만 듯한 느낌이다. 최한기의 '人定'이 보여주는 과학적 用人論을 해석을 곁들인 번역을 통해서 상찬하는데 양과 질의 면에서 너무 소략하게 다루고 있어서 '재해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동아시아 정체성…'이 유학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소 역사적인 방법으로 철학적인 성찰은 부차적이다. 그리고 현실문제를 다루지 않거나, 너무나 극도로 추상화된 나머지 현실을 왜곡하는 단어들을 통해 현실을 진단하고 있다. 이럴 때 유학은 더욱 과거로 밀려가며 학자들도 그 과거를 붙잡고 같이 밀려갈 뿐이다. 반면에 '유교의 현대적 해석…' 시리즈가 유학적 유산에 접근하는 방식은 단어 하나하나를 현대의 해석학적 방법으로 뜯어본다. 그래서 그 단어들의 원래 뉘앙스와 그것의 변천, 오늘날의 유사 단어와 갖는 차이점까지를 음미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理, 氣, 敬, 未發, 已發 등의 단어가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사어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육체, 감각과 욕망의 사이를 여전히 헤집고 다니는 살아있는 실체임을 알게 해준다.

'논어'의 수기치인이 자기를 닦고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노자'의 회의가 현실세계의 모순을 향한 풍자였으며, '주자학'이 불교와 도가라는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고도로 논리적으로 복잡해졌다면, 그리고 이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런 '논어'와 '노자'와 '주자학'을 따르는 오늘날의 학문의 방식도 방법론을 엄격히 관리하고, 세상을 향해 붓을 들고, 나름대로 중층적인 논리의 구조물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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