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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풍경] : 책의 위기, 미래의 책- 아우라가 사라진 디지털 시대…책에 관한 존재론적 명상
[예술계풍경] : 책의 위기, 미래의 책- 아우라가 사라진 디지털 시대…책에 관한 존재론적 명상
  • 교수신문
  • 승인 2001.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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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11 14:43:25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이다지 신선하고 상냥스러우랴! 고서점에서 먼지를 털고 겨드랑 땀내 같은 것을 풍기는 것들은 자못 미망인다운 함축미인 것이다.”이태준의 1941년 수필집 ‘無序錄’의 한 구절은 종이책의 아우라를 느긋하게 즐기는 독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는 책의 아우라에 비판 없이 빠지기는 힘들게 되었다. 인용문도 그런 혐의가 짙지만, 우리가 책이라는 물체에 갖고 있는 애착은 페티시즘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이라는 의미 단위가 폐기되어야 좋을까 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는 인터넷의 확산으로 인한 지식 개념의 변화나 하이퍼텍스트의 등장 등 책이라는 매체를 위기로 내모는 듯한 상황들도 전개된다. 이와 함께 책이라는 사물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도 진행 중에 있다.

사물로서의 책과 인문정신의 사이

미술계에서는 ‘책’을 전면에 내세운 두 기획전이 동시에 열리며 눈길을 끌었다. 먼저, 강애란 이화여대 교수의 설치작품 ‘디지털북 프로젝트’는 책의 사물적 측면과 인문정신 사이의 관계를 전향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어둠침침하고 천장이 낮은 비좁은 서가. 아무도 읽지 않는 한 세대 전의 인문학 서적들(‘페이퍼북’)이 먼지에 쌓인 채 책장에 처박혀 있거나 바닥에 팽개쳐져 있다. 한편, 남루한 페이퍼북 사이로 조명장치가 되어 있는 책 모양의 오브제(‘오브제책’)와 LCD 모니터를 장착한 비디오(‘비디오북’)가 광채를 발한다. ‘오브제책’은 컴컴한 복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EXIT 기호처럼 FOUCAULT, DELEUSE, NIETSZCHE 등의 기호가 초록빛 조명을 발한다. 여기서 관객은 ‘저자의 죽음’ ‘지식의 유목민적 방랑’ 등 총체성을 거부하는 철학을 환기하라는 강요를 받게 된다. 종이책의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에 탈근대의 전언이 들어서는 것일까.
한편, ‘비디오책’의 동영상은 문자텍스트가 이미지텍스트로 이행하는 양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정보 습득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물리적으로 언제나 거기 있는 종이책이 초시간적 지식의 현전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동영상 이미지는 지식과 정보의 임의성과 유동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치물이 지식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라는 매체가 운명을 다했다 하더라도 책에 담긴 지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유통된다는 메시지를 해석해 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이 오늘날 지식의 내용에 적절한 형식이 아니라는 명제를 확인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갤러리 아트사이트의 기획전 ‘책의 향과 기’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종이책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디지털북 프로젝트’가 책의 물체적 속성을 극복하려 했다면, 6인의 중견화가가 참여한 ‘책의 향과 기’는 오히려 책의 물체성을 극대화하려 한다.
극사실 기법으로 책 속의 문자와 문자가 지칭하는 사물을 오버랩시키는 고영훈 화백의 작품이나 글자를 적어놓은 질료로 종이가 아닌 도자기를 선택한 윤광조 화백의 작품은 기존의 종이책의 의미론적 한계를 암시하며, 김병종, 김상구, 이왈종 화백의 화첩 형태 작품들 역시 책의 형식은 내용을 구현하는 물체성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전반적으로 동양의 시·서·화 전통이나 한자문화권 특유의 서예전통이 책의 물체성 논의에 일조하리란 기대가 엿보인다.

책의 물체적 속성에 관한 극단의 사유

이런 기획은 서적 출판의 위기 인식과 활로 모색의 일환으로 등장한 북아트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북아트는 단순한 북디자인을 넘어서 미술성을 책의 생존 요건으로 강조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북아트가 책의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다면, 진지한 인문적 고려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껏해야 책에 대한 향수를 조장하고 전유하는 장식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획전의 작품들은 책이라는 매체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사색할 계기가 될 수 있다.
두 기획전은 종이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는 의미에서 보르헤스가 묘사하는 희극적 상황에 해독제로 기능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느 구역에서는 젊은이들이 책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야만스럽게도 책장에 입을 맞춘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자도 해독할 줄 모른다.” 그러나 종이책의 위기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반성에 그친다면, 피상적 인식과 감정적 반응 이상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아무튼 매체의 변화가 전언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의미에서, 책의 위기는 우려와 불안을 일으킬 만하다. 김정아 객원 기자 anonio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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