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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天은 한국 수묵의 정체성을 놓쳤는가...
南天은 한국 수묵의 정체성을 놓쳤는가...
  • 강선학 미술평론가
  • 승인 2004.03.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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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송수남의 '붓의 놀림' 연작을 보고

▲'붓의 놀림', 한지에 수묵, 80.9*100.5cm, 2003 ©

한국화의 정체성 문제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던 송수남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진다. 요약하면 이렇다. 정체성이란 타자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며, 특히 서양화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건 그의 작품이 서양화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다름’이 한국화의 정체성 주장과 논의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으로 맺어질 것이다.

50여 년간의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가지 일들에 관계를 가진다면 그 개인은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여겨지는 것들로 뒤섞인다. 송수남의 작업을 보면서 우리 현대한국화의 궤적을 떠올린다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賢의 먹색 짙은 풍광에서부터 잭슨 폴록이나 뜨거운 추상화 유의 거친 붓질과 의식의 자유스러운 흐름에까지 자신을 담금질해 온 그의 세계는 결코 녹녹치 않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개인적인 변화의 정당성 혹은 필연성, 그 동안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가 최근 도달한 작업, ‘붓의 놀림’에 대해서 불편함을 감추기 힘들다. 이들 작업에서 보여주는 개별 작품으로서 형식적 내용적인 평가와 무관하게 작업의 전체적인 흐름과 그가 추구해온 수묵화, 혹은 한국화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제기되는 혼란 때문이다. 그가 만든 혼란이거나 전적으로 그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화의 정체성 문제에 누구보다 매진해온 작가로서, 원숙기로서 그의 세계를 보여주는 ‘붓의 놀림’은 그의 지향과 배치되는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붓의 놀림’은 1960년대의 번지기 기법이나 ‘가나다라’ 등에서 보이는 문자성 등과 연계를 찾아볼 수 있지만 붓의 놀림과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세계다. 한국화에서 정체성은 우리가 그려왔고, 그리고 있는 형식과 그에 의해 드러나는 내용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그 형식을 뛰어넘는 절대정신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림 그리기의 절대정신이란 근본에 대한 실체론적 유혹일 뿐이다. 그림은 형식에서 시작된다. 그림에 있어 정체성 논의도 마찬가지다.

'한국화의 정체성'은 없고 '회화정신'만 확인했을 뿐

▲'붓의 놀림', 한지에 수묵, 60.5*72.5cm, 1995. ©

그 형식적 다름이 내용의 다름을 담보해주고 다른 장르와 차이를 극대화시키고 정체성에 대한 주장의 당위성을 확보해준다. 그러나 ‘붓의 놀림’은 그가 지향한 이념이나 형식적인 성과와 무관한 추상화다. 서양의 추상화와 전혀 변별력이 없는 현대추상화의 하나다. 그의 추상화는 그에게서 하나의 새로운 시도일 뿐 전통이나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지는 접점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개인적인 변화의 당위와 다르게 그의 이 추상화는 추상화로서 평가돼야 하고 한국화의 정체성과 연계시킬 때 한국화의 개념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런 면에서 그의 개인적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화의 정체성을 부단하게 추구해온 족적으로 봐서 결코 개인적 문제나 취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부분이다.

치기. 흘러내리기, 뿌리기, 겹치기 등 먹흔의 구조적 조형성이 이 작품의 외연이며, 그 이면에 놓인 의미들 역시 조형적 자율성이다. 말하자면, 사군자가 기존 표상에 근거해서 최소한의 형상에 자신의 뜻을 기탁하고 그 울림으로 문기 운운하는 태도라면 ‘붓의 놀림’은 붓의 놀림이라는 자율성, 화면의 자율성, 붓의 자율성, 먹의 자율성에 방기된 의미들이고 조형이다. 그것에서 활달한 용필과 용묵은 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수묵화 혹은 수묵정신, 선비정신 운운하는 것은 과도한 의미 부여일 뿐이다.

송수남은 먹을 재료가 아니라 정신이라 한다. 그리고 수묵정신과 문인정신을 연결시킨다. 그렇다. 한국말은 단순한 한 종족의 표현수단이 아니라 그 종족의 정신이다. 먹이 정신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국말이 정신이기 위해서는 한국어 어법에 맞는 진술과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신이 오롯하게 나온다. 먹도 마찬가지다. 먹만 쓴다고 정신이 아니라, 먹으로 드러나는 내용이 무엇이며, 그 먹이 제대로 쓰였느냐에 있다. 먹, 그것이 곧 정신이라도 먹의 쓰임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붓의 놀림’은 그 내용에 있어, 서양화의 추상화가 주는 조형적인 자율성에 닿아 있고 먹의 형식적 자율성에 닿아 있지 한국화의 정체성에 닿아 있다고 보기 힘들다. 사물에 기탁해서 최소한의 형태와 최대의 이념적 공간을 확보하려는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서 회화로서 이념의 자유나 형식의 자유에 경사돼 있다. 그리고 그가 그 동안 해온 작업 특징과도 사뭇 다른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경지는 굳이 한국화일 이유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의 한국화 정체성 탐색은 무얼까 하고 다시 묻는 것이다. 형식을 거스를 때 과연 그 정체성 논의가 논지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인지를 새삼 묻게 된다. 그것은 평자의 입장에서도 부담스럽다. 굳이 한국화의 정체성이라는 기치를 그의 작품과 연관시켜야 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의 한국화 정체성 주장이 도리어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으며, 평자들 역시 작품 분석을 통해서 정체성의 정당성을 모색하려 하지 않고 주장에 휘둘려 그 주장으로 작품을 보아온 것이 아닌지 한다. 이념과 실천이 같기도 하고, 이념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때문이다. 내가 비록 서양화를 하더라도 동양화의 이념이나 정체성에 대해 주장하고 논리를 펼 수도 있고 그것이 하등 이상할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을 굳이 한국화의 정체성에 빗대어 평가해야하는가 의구심이 생긴다.

▲'여름나무', 한지에 수묵, 63*94cm, 2000 ©
그의 ‘붓의 놀림’은 한국화의 정체성보다 도리어 '회화정신'이라는 자신의 심정적 진술이라고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1999년 이후 이 작품들의 일부는 아래로 그은 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조직, 선과 선 사이의 도톰하게 올라온 재질감, 초록, 빨강, 회색 등의 색상처리, 선으로 내려오다 화면 아래에 단색의 띠처럼 색면 처리를 하는 등 박서보의 1990년대 후반기 이후의 ‘묘법’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1968년 작 ‘가나다라’ 등에서 이응노나 남관의 문자추상을 읽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볼 때 그의 추상 작업은 당대의 추상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유사는 충분히 치명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의 ‘붓의 놀림’은 개인적 필연성과 장르적 차이 사이에 겉돌고 있거나 그 틈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는 한국화의 정체성 이념보다 현대화로서 한국화를 새롭게 구축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한 추상형식을 개인적 필연성으로 도달한 것이 아닐까.

강선학 / 미술평론가

●南天 송수남의 수묵화 세계

南天 송수남(홍익대 교수)은 지난 50년간 한국화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적 시도로 ‘전통수묵의 현대화’에 주력해온 작가로 꼽힌다. 몇 가지 두드러진 전환점들이 있는데, 1969년 개인전에 색동, 석탑 등을 등장시키면서 한국적인 것에 천착하기 시작한 것, 70년대에는 관념적 산수화에 주력한 것, 그리고 1975년부터는 서구미술과의 조우로 ‘한국적이면서 현대적인’ 수묵화 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이후 남천은 본격적으로 수묵화의 세계로 회귀해, ‘수평구도를 바탕으로 검은 산들과 하얀 여백이 어우러지는 간결하고 다듬어진 산수양태’로서 이른바 ‘남천 산수’를 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관념산수의 전형화 된 양식에서 벗어난 구성적이고 조형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90년대 들어서는 ‘붓의 놀림’ 이라는 명제 하에 수묵자체가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맛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보여 왔다. 이 외에도 남천을 거론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건 80년대 수묵의 현대적 가능성을 모색하며 집단적 수묵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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