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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2]인간이 자유롭게 사는 평등한 사회에는 정부가 필요 없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2]인간이 자유롭게 사는 평등한 사회에는 정부가 필요 없다
  • 교수신문
  • 승인 2020.07.1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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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동2

모든 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아
극심한 공산주의 비열하다고 공격하기도

인간은 종교 없이 살 운명임을 강조
도덕 법칙은 여전히 영원하고 절대적
재산이란 무엇인가 표지(1841년판)

프루동의 1840년 작품인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 ce que la propriete?) : 브장송 아카데미의 존경하는 회원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에세이》(이하 재산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자신들의 특권인 재산과 정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점에 큰 충격을 받은 회원들은 그 헌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저자가 회상했듯이 오랜 시간 동안 자세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평한 분석 끝에 그는 “재산은, 당신이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어떤 원리로 보든지 간에 모순된 개념이다! 재산을 부정하는 것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즉시 내 정의에서 진정한 형태의 정부가 아나키 상태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추론했다”고 이야기한다.

프루동은 “노예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면 나는 단 한 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라고 답한다”로 시작하는 그 책은 “인간에게 사상, 의지, 인격을 뺏는 권력은 생사여탈의 권력이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살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소유, 그것은 도둑질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어떤 이름으로 가장해도 억압이다. 사회의 최고 완성은 질서와 아나키의 통합에 있다”고 하며 모든 정부의 근간인 소유를 비판한다. 그리고 자유는 평등이고 아나키라고 하며 인간이 자유롭게 사는 평등한 사회에는 국가나 정부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재산은 도둑질이다’라는 대담한 역설은 그의 가장 유명한 슬로건이 되었고 그 후 그 의미는 계속 울려 퍼졌다. 그러나 프루동은 그 원리가 자신에게 계시로 다가왔고 그의 가장 소중한 생각이라고 주장했지만, 모렐리는 18세기에도 비슷한 생각을 밝혔고 브리소(Brissot)는 프랑스 혁명 동안 처음으로 그것을 선언했었다. 사실 프루동의 슬로건은 그 말만큼 혁명적이지 않았다. 슈티르너는 재산 개념의 사전적 타당성을 허용해야만, ‘도둑질’의 개념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빨리 지적하였다. 실제로 프루동은 사유재산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재산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자유의 적으로 불렀다. 그는 주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세입의 형태로 전용하는 부동산 소유주들에게 반대했다. 그는 소유권을 가진 자에게만 제한되거나 그로 인해 생기는 혜택으로 ‘소유’를 의미하는 한 재산에 찬성하고 있었다. 즉 그가 모든 소유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어 1846년에 쓴 《경제적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Systeme des contradictions e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ere)》에서는 자신의 노동과 저축의 과실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썼다.

이처럼 프루동은 자본가뿐만 아니라 그의 당대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극심한 공산주의를 억압적이고 비열하다고 공격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일을 선택하기를 좋아하는 반면 공산주의 체제는 ‘개인은 전적으로 집단에 종속되어 있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평등의 원칙과, 프루동의 마음과 너무나 가까운 양심의 자율성을 침해한다. 사회는 자본과 통치 또는 공산주의 국가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프루동은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권위가 자신의 지적 발달에 반비례한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사회에서는 힘과 교활함이 정의의 영향력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마침내 평등의 승리와 함께 미래에 사라질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재산과 귀족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 쇠퇴하고 있다. 인간이 평등에서 정의를 찾듯이 사회는 아나키 상태에서 질서를 추구한다.” “아나키 상태는 통치자나 주권자의 부재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정부의 형태다.” 

프루동이 인정했듯이 보통 ‘아나키’라는 단어에 부여되는 의미는 ‘원칙의 부재, 법의 부재’라는 뜻이며, ‘무질서’와 동의어가 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불평등한 분배는 사회의 혼란과 혼란의 주요 원인임을 보여줌으로써 ‘아나키가 질서’라는 명백한 역설을 일부러 긍정하기 위해 나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역사적인 아나키즘 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

《재산이란 무엇인가?》는 금지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법무부는 결국 위험하기엔 너무 학구적이라고 결정했다. 그 책은 마르크스로부터 ‘통찰력 있는’ 소유권에 대한 ‘최초의 결정적인 강력한 저서’라는 평을 들었고 이어 프루동은 제2의 소유론을 썼으나 앞의 책과 달리 고소를 당했다. 제3의 소유론인 《재산 소유자들에 경고(Avertissement aux Proprietaires)》(1842)에서 그는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면서 재능과 천재성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우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기소되었지만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그들은 이 책이 너무 복잡해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이어 사회의 근본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프루동은 철학으로 눈을 돌려 《인류의 질서 창조에 관하여》를 썼다. 그 출발점은 노자와 헤겔의 출발점과 비슷하다. 우주의 본질에까지 침투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유동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자연과 사회의 이러한 끊임없는 움직임은 ‘대화형 연속’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것은 대립하는 힘의 조정을 통해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은 생물이 단지 관념일 뿐인 세계에 대한 관념주의적 해석을 제시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가 말하는 ‘이념-현실론’에 따르면, ‘존재의 현실’은 식물과 동물의 왕국을 거쳐 인간을 통해 광물 세계에서 점차적으로 증가한다.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최고조에 달하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가장 자유로운 조직이자 가장 관용적이지 않은’ 것이다. 프루동은 ‘인간은 종교 없이 살 운명’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겉으로는 종교적인 껍데기가 일단 제거되고 나면 도덕 법칙은 여전히 영원하고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프루동은 그의 역사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노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모든 사건이 자연과 인간 고유의 일반적인 법칙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하여 장기적으로는 진보가 불가피하지만,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면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인간의 의지와 숙고,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카를 마르크스

1844~5년 겨울, 프루동은 정부와 재산에 대한 그의 다음 대규모 공격을 쓰기 위해 파리로 갔다. 소르본대학이 있는 라틴구에서 그는 마르크스, 헤르젠, 바쿠닌을 포함한 많은 정치적 망명자들을 만났다.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저자를 만나고 싶어한 그들은 열정적으로 헤겔 철학과 혁명 전술을 토론했다. 바쿠닌과 헤르젠은 프루동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바쿠닌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점점 커지고 있는 국제 아나키즘 운동 속에 확산시켰고, 헤르젠은 그것을 러시아 인민주의의 땅에 뿌렸다. 그러나 마르크스와는 미묘했다. 처음에 마르크스는 《재산이란 무엇인가?》를 반겼고, 그와 프루동은 파리에서 한동안 친하게 지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나중에 자신이 프루동에게 헤겔을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엥겔스는 프루동의 글이 저자에 대한 ‘가장 큰 존경’을 그에게 남겼다고 썼다. 마르크스가 그들의 국제공산주의 그룹에 참여하도록 하려고 했지만, 프루동은 마르크스의 교조적이고 지배적인 성격과 그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로 인해 순식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프루동이 사회의 법칙을 찾는데 협력하기로 합의했지만 프루동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끝이 났다. “선험적 독단주의(교조주의)가 다 소용없게 된 후에는 우리가 사람들을 그런 교리를 가르치는 걸 꿈에도 꾸지 말자. … 난 물론 모든 의견을 대중 앞에 내보이자는 당신 생각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훌륭하고 충실한 논쟁을 해보자. 세상 사람들에게 지적이면서도 멀리 내다보는 관용을 보여주자. 그러나 우리가 단지 (사회주의) 운동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불관용과 편협함의 지도자가 되지 말자. 새로운 종교의 선구자인체는 하지 말자. 비록 그 새 종교가 논리학의 종교이고 이성의 종교라도 해도. 우리 모두 다 함께 모여서 모든 저항을 독려하고, 모든 배제주의와 모든 신비주의를 철저히 비판하자. 한 문제라도 다 해결되고 토론되었다고 간주하지 말고, 우리가 최종 근거를 제시했을 때도 필요하다면 아이러니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토론을 다시 시작하자.”

프루동의 비난에 화가 난 마르크스는 그 편지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프루동의 다음 작품인 《경제적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이 나오자 저자를 길고 강하게 공격했다. 프랑스어로 쓴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인간의 본성이 불변의 본질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쁘티부르주아 이상주의자로 비판했다. 이에 푸르동은 격노했지만 1847년 7월 23일자 일기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촌충이다!’라고 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의 결별은 제1인터내셔널 내 마르크스와 바쿠닌 사이의 분쟁에서 첨예하게 대두된 아나키스트와 권위주의 사회주의자 분열의 시작이었다. 마르크스는 계급협력을 옹호하고 노동조합과 의회활동을 금지한 것에 대해 계속해서 프루동을 공격했고, 프랑스 노동계급이 자신의 생각보다는 그의 생각을 채택했다는 사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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