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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이성의 귀환
비판적 이성의 귀환
  • 도정일 비평이론
  • 승인 2004.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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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비평의 정신

도정일 / 경희대·비평이론

타인의 사유, 담론, 표현에 대한 메타 언술로서의 비평이 일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극단과 과잉에 대한 견제'이다. 이론은 성격상 어떤 가설 혹은 주장을 그 극단적 지점까지 밀고나가야 한다는 요청을 외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극단을 추구함으로써 이론은 종종 새로운 발견에 도달하거나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자면 이미 보이는 것들과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보지 않기로 하는 맹목의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 방법의 문제에서 이론과 비평은 확연하게 갈라선다. 맹목, 과잉, 극단의 추구가 이론의 방법론일 수 있다면, 비평의 경우 그것들은 견제의 대상이다. 극단의 추구를 이론의 열정이라 한다면 이 열정의 불을 지피는 것은 분별이기보다는 맹목이다. 그러나 비평은 맹목, 극단, 과잉을 싫어한다. 비평을 위한 '열정의 불'이란 가당치도 않은 은유이다. 비평은 불의 담론이 아니라 물의 담론, 그것도 차가운 얼음물의 담론이다. 비평은 뮤즈의 날개를 타지 않는다. 비평의 수레는 '분별'이다.

지난 수십 년간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국내외 학계에 부단한 충격과 자극을 가해 온 것은 ‘이론’ 혹은 ‘이론들’이다. 구조주의, 맑시즘, 정신분석담론, 기호학, 수용미학, 페미니즘, 해체론,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신역사주의, 수용이론―이것들은 구조주의가 등장한 1960년대 이래 화려한 ‘이론의 한 시대’를 열었던 다양한 이론들의 이름이다. 지금 그 이론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론의 쇠퇴를 발생시킨 가장 큰 요인은 ‘이론의 넌센스화’다. 극단과 과잉의 추구를 통해 이론(들)이 도달한 것은 어떤 발견이 아니라 이론 자체의 희극적 넌센스화이고 그 도산이다. 극단적 주장과 과잉의 추구를 통해 현대 이론들이 이룬 업적의 목록은 刀斧手의 장부와 흡사하다. 현대 이론들의 상당수가 합작으로 도살해낸 것들 중에는 이성, 진리-진실, 보편, 객관성, 역사, 현실, 근대-근대성, 진보, 주체, 의미, 정신 등이 포함되고 이것들을 끌어내린 자리에 이론이 대신 내세운 것들의 목록에는 비이성(unreason), 허무주의, 구성주의, 우연론, 비본질론, 상대주의, 탈근대론, 무의미론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이론의 도산을 초래한 것은 현대 이론의 전면적 ‘허위성’ 때문이 아니라 극단적 ‘과잉’ 때문이다. 이성 혹은 이성중심주의의 폐해와 자기기만을 지적하는 일은 반드시 이성을 도살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다. 보편주의나 목적론적 도그마의 횡포를 지적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역사의 전면적 무의미론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역사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사실은 무의미의 보편주의 혹은 보편적 무의미론을 내세우는 일이다. 정의, 자유(해방), 평등 같은 가치들을 인간 사회의 역사적 ‘보편원칙’으로 설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근대적 이성의 과잉이 보기 싫어 이성의 전면적인 탈근대적 도살을 주장하는 것은 제 얼굴 보기 싫다고 머리통을 잘라버리는 일과 같다. 과잉을 치유하기 위해 과잉의 치료법을 동원하는 것이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극단이론의 오류이다. 비이성과 불합리성(irrationality)의 경축만으로는 어떤 사회도 유지되지 않는다.

국내 사회과학과 인문학계의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는 이런 극단적 과잉이론의 영향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런 극단성은 예컨대 민족주의, 국민주의, 근대적 국민국가, 국가주의 등에 대한 젊은 비판자들의 논리와 태도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국민국가나 민족주의는 지금도 세계화 이론가들과 시장주의자들의 집중적 표적이 되어온 ‘동네북’의 하나다. 시장질서에 의한 세계화의 시대에는 국민국가라는 근대 모형의 ‘폐물화’가 불가피하다고 시장 세계화주의자들은 줄곧 말한다. 그러나 시장체제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은 여전히 가장 강대한 ‘국가’로 엄존하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 지역은 이미 갈등의 역사시대를 넘어 탈근대적 탈역사(post-history)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이 잘 알려진 ‘후쿠야마 주제곡’이다. 그러나 9·11 뉴욕 테러 사건은 미국이 탈역사시대에 들어서기는커녕 여전히 갈등의 역사시대에 나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 갈등의 주 생산국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러시아, 중국, 일본 같은 강대국들이 근대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극단과 과잉의 주장을 점검하고 견제하는 것이 비평의 과제라면, 분별은 비평의 방법이고 태도이다. 이 방법 속에는 공정성, 균형, 비판적 거리의 유지, 이성의 온당한 행사, 진실에의 헌신, 객관성 같은 덕목들이 포함된다. 이 덕목들이 고전적 의미에서 비평의 ‘아레테’(arete)이며 그 덕목 혹은 아레테를 지키고 발휘하려는 것이 비평의 정신이다. 이 점에서 비평 정신은 비판적 이성의 행사이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비이성적 동물이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99.4 퍼센트의 비이성과 0.6퍼센트의 이성으로 되어 있다. 인간이 비이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인간과 사회의 이성적 합리화를 신봉한 것이 근대의 환상이었다면 인간이 보유한 미량의 이성까지도 도살시켜 인간의 전면적 비이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탈근대론적 환상이다. 이런 몰이성주의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무엇인가. 이성이 제 아무리 미량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개인적 공적 사용과 작동 없이는 정의, 공평성, 평화, 공존, 평등, 자유가 불가능하고 의미 있는 행동과 비판적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비이성의 과잉을 견제하고 이론의 극단주의에 개입하려는 비평의 정신은 지금 같은 시장주의 시대에는 더 없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시장’(Market)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지배적 질서, 문화, 정신상태이다. 시장을 떠나서는 지금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시장은 지금 비평을 전방위에서 포위하고 있는 전면적 환경이다. 이 환경에서 비평이 할 일은 무엇인가. 시장이 지배적 질서라면 그 질서는 이미 그 자체로 과잉이고 극단이며, 따라서 비평의 적극적 견제 대상이다. 지배질서에 대한 저항, 지배문화에 대한 반(反)문화가 아니라면 비평은 무엇인가. ‘시장’이라는 용어의 현대적 의미영역 속에는 시장체제의 지구화, 자본주의 시장의 ‘승리’, 세계화, 국민국가 소멸론, 탈역사, 탈근대, 민주주의,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는 새로운 국제질서, 개인주의, 행복, 세속주의, 폭력배제, 시장의 힘에 의한 평화, 기업주의 등등의 개념들이 포함되고 연결된다. 그러나 이런 개념들이 시장과 모순 없이 순탄하게 연결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시장체제가 평화를 강화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세계화와 시장이 평화, 번영, 행복을 가져온다는 주장도 정확한 현실 파악에 입각해 있지 않다. 시장세계화와 신무역질서는 지금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개도국 농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이다. 시장질서의 지배가 야기시키는 이런 폭력, 불안, 정의와 공정성의 파괴, 이성의 맹목적 도구화를 부단히 지적하고 그 질서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비판적 정신으로서의 비평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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