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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기념 시론 - 분열된 사회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300호 기념 시론 - 분열된 사회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 김진석 인하대 철학
  • 승인 2004.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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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衝左突'의 정신으로 '脫'의 文化를

교수들, ‘지식인’ 역할을 독점하지 말라!

▲김진석 인하대 교수 ©
지난 20세기 후반을 돌아보면 한국 교수집단은 다른 어떤 사회적 집단보다 과도하게 지적 권력을 행사했으면서도, 독자적인 지적 권위와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유감스런 상태에서, 현재 대학 지식인의 모습은 분열과 착종의 연쇄반응 속에 있다. 연구자, 産學협동자, 지적 엔터테이너, 사회운동가, 지적 논쟁가의 역할이 제대로 규정되고 분리되지 않은 채 얽히고설켜 있다. 여기서 불필요한 혼란이 생긴다. 한쪽에서는 너무 시장경쟁으로 끌고 가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식이다. 또 충실한 연구자와 대중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긴장과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대표적인 지식인 집단이 자신들의 역할을 내부적으로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으면서도, 밖의 사회에 대해 ‘우왕좌왕’한다고 훈수를 두고 있는 이상한 형국이다.

김대중정부는 초기에 ‘신지식인’을 생산하려고 했고, 그것의 관 주도적 졸속성을 대부분의 전통적 지식인들은 냉소하고 비판했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구지식인이 되기를 거부했던 지식인들은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바로 그 자리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듯하다. 지식인의 역할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면서도 지식인의 기득권은 고스란히 유지하려 했으니 말이다. 정부가 추진한 ‘신지식인’ 사업이 얼마나 한국 사회가 모호하게 지식인을 동경하는지를 보여준 소동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교수 중심의 지식인사회의 완고함을 보여준 사건으로 여겨진다. 대중이 아닌 다중 사회에서 모든 개인들은 알게 모르게 ‘지식인’이다(굳이 그 말을 쓰자면). 서민, 아니 빈민도 사회적 약자에 관한 한 나름대로, 그리고 교수들보다는 훨씬 더, 전문가인 셈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생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많은 교수들은 회사원이 되어 가고 있다. 특히 CEO 총장을 외부에서 영입하는 경향이 강해질수록, 그리고 일률적으로 계량화된 논문숫자가 학술진흥재단에 의해 통제될수록, 지식인의 회사원화는 강화될 것이다. 이 경향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자. 드러내면서 그에 대해 논의하자. ‘회사원적 현실’에 비교하면 사실 ‘연구자로서의 교수’도 사치인 듯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회사원’이란 말도 사치이다. 그저 실적을 숫자로만 계량화하는 무모한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전국규모학술지 게재논문이라는 기준은 내부의 저질을 걸러내는 아주 기본적인 임무는 할 수 있을지언정, 지적 행위에 대한 솔직하고도 용기 있는 판단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 행위에 대한 솔직하거나 생산적인 기준을 제공하지 못하는 집단은 얼마나 불쌍한가.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현대적 지식인의 고향이었던 프랑스에서도 ‘지식인의 종언’을 외치는 소리가 벌써 있었다. 그 지식인은 19세기 말에서 시작하여 고작 한 세기 동안 존재한 셈이다. 그러니 우리도 고전적 지식인의 종언을 맹목적으로 서글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고전적 지식인의 기득권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식의 복합적 확장을 긍정하는 계기로 인식해야 마땅하다.

지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채 대학에 안주하는 구시대적 지식인들이 조장하는 사회악이 학벌이다. 학벌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능하면서도 폭력적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서울대는 이제 갈림길에서 자신을 찢어야 한다. 획기적으로 규모를 줄여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거듭 나던지, 아니면 국립대의 취지에 걸맞게 사회에 공공적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 선택을 거부하는 서울대에 싸움을!

실천적으로 ‘우충좌돌’하자!

한국 사회에는 실천적 ‘좌충우돌’을 쉽게 비하하는 행태가 완강하다. 마치 형식적인 지적 객관성만 내세우면 저절로 중도로 간다는 듯이! 그리고 마치 어떤 정치적 갈등도 없다는 듯 이! 사실은 어떤가? 자신을 극우와 구분하지 못하는 보수가 아직도 절반 가까이 되고, 거꾸로 자신을 근본주의적 극좌와 구분하지 않는 좌파도 적지 않다.

이 상황에서 나는 ‘右衝左突’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충’이 앞에 오는 이유는, 먼저 극우 및 그것과 구분되지 못하는 우파와 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딪침 속에서 우파는 극우와 분리될 수 있는지 혹은 분리되지 않는지 날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보수주의자 이문열조차도 말로는 건전한 보수를 극우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우충’의 강력한 예는 ‘안티조선’이었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좌돌’로 연장되면서, 우리는 과도하게 근본주의적 경향을 띠는 좌파와 부딪친다. 이 경우 그 좌파는 이상주의적 근본주의와 구분되는지 아니면 구분되지 않는지 드러날 것이다.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동기가 드러나면 마치 모두 파시즘인양 호들갑을 떠는 ‘일상적 파시즘론’, 평화를 추구한다면서 모든 폭력을 이념적으로 배제하려는 이상주의적 평화주의, 한국의 모든 역사적 상황을 파시즘적 민족주의나 군사적 민족주의의 궤적으로만 보는 보편적 사회주의(박노자)도 이런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자유방임과 다른 '기우뚱한 균형'

도덕적 근본주의는 이 둘, 극우뿐 아니라 극좌에도 같이 해당한다. 그러므로 많은 점에서 이 둘은 짝패다. 한쪽이 다른 쪽에 기생하고, 더 나아가 서로 공생관계를 맺는다. 가장 근사한 극좌적 이념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극우적 행태를 하는 매체와 가까워지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가 기독교 근본주의에 근거하고, 그것에 반대한다는 대항세력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근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싸워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도덕적 근본주의는 근본적으로 폭력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마치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시늉을 한다. 그러나 어떤 근본주의든, 그것이 순수하고 엄격해질수록, 폭력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충좌돌’은 모든 경직된 근본주의와 부딪치는 일일 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아카데미즘은 가장 강력한 두 경향에 내맡겨져 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시장근본주의가 그 하나이고, 거꾸로 시장을 맹목적으로 반대하면서 생명·생태·평등을 절대화하는 근본주의가 다른 하나이다. 이 두 극단은 광신적인데, 이 둘 역시 서로 대립하는 듯한 겉보기와 달리 서로 기생하고 공생한다. 이런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충좌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저 극우적 혹은 시장 근본주의가 발호한 상황에서, 그에 대항하느라 엉겁결에 생명과 평등을 절대화하는 근본주의에 이념적으로 기댔기 때문이다. 후자는 전자에 대항하는 시대적 역할을 나름대로 하기는 하지만, 그 둘은 서로 버티고 으르렁거리면서 서로에 기생한다. ‘종교’가 되어버린 시장주의도 거부하고, ‘종교’가 되어버린 생명주의도 거부하자. 신자유주의적 근본주의도 거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글로벌 경제를 거부하지는 말자.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공언하면서 제3의 길을 경계하는 홉스봄조차도 글로벌 경제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것을 자유방임주의와 혼동하지는 말자고 한다. 이 정도의 ‘기우뚱한 균형’을 확보하자.

한국형 담론의 회오리, 악순환에서 선순환을

한국형 담론은 거센 회오리 한 가운데 있다. 경제학자 중 90% 이상, 교수들 중 70% 정도가 미국학위소지자이며, 미국문화 쪽으로 날아간 기러기아빠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교수일 정도로 미국에 편향된 상황에서, 이제 그 미국종속성에서 탈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렇다고 유럽, 특히 프랑스처럼 반미의 기치를 높이 들 수도 없다. 프랑스의 미국 대항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가장 행복하고 예외적인 예였을 뿐이다. 한국은 그처럼 강력한 항미를 구사할 여유가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런데다 미···러 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유일한 상황이라니! 이 정치경제적이며 문화적 조건을 무시할 방법은 도저히 없을 듯하다. 정치가 혹은 기업가만 이 조건과 맞닥뜨리는 것은 아니다. 지적 담론과 문화이론도 마찬가지다. 물론 과거 국가보안법과 냉전주의가 지배했던 시절을 겪은 우리에게 평화와 인권, 자율성은 이제 더 이상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치경제적이며 문화적 경쟁조건을 무시한 평화주의와 인권주의, 자율주의로만 내달릴 수 있을까?

세속적 '더러움' 감수하자

여기서 어쩔 수없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 사고는 세속주의의 ‘더러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국형 담론이 더러울 수밖에 없음을, 혼잡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자. 순수한 담론을 추구하지 말자. 글로벌 환경 속에서 때로는 공공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국가권력의 더러움을 맥없이 겁내지 말자. 국가의 탈을 쓰면서 국가에 탈을 내고 또 국가에서 이탈하자. 문화조차도 숭고해질수록 점점 폭력적 성격을 띠는 시대적 형국 아닌가. 아무리 ‘소수파적’ 문화생산물조차 생산국의 이름으로 소비되는 상황 아닌가. 그러니 문화적 폭력의 탈을 쓰면서만 마찬가지로 거기에 탈을 낼 수 있고 거기서 이탈할 수 있을 듯하다.

주변의 정치경제적이며 문화적 권력을 인정하는 담론은 알게 모르게 그것과 전략적 긴장 관계 속에 있을 터이고, 정치와 문화로서의 전쟁, 더 나아가 전쟁으로서의 정치와 문화에 진입해야 할 때도 있을 듯하다. 그것이 민족(혹은 개인), 문화 그리고 권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악순환도 겁내지 말자. 아마도 이 악순환의 탈을 쓰면서만 거기에 탈을 내고 거기에서 이탈할 수 있을 것이다. 두려운 일이지만 현재 세계 체제에서 악순환의 위험이 전혀 없는 선순환은 힘들다면, 악순환의 와중에서 선순환을 찾아야 한다. 다만 악순환에서 생기는 상처는 사회가 껴안아야 한다. 복지 차원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문화적 ‘탈의 놀이’를 겁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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